선대의 유업에 사로잡힌 동북아 정치

[스페셜리스트 | 외교·통일] 김동진 세계일보 국제부 차장

최고 권력자들이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자기 가문의 유업을 이루기 위해 역사 역주행의 가속 페달을 밟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최근 한반도와 그 주변의 답답한 상황이다.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가 큰 맥락에서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김정은은 김일성·김정일의 뜻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의 유훈통치를 펼치고 있다. 인민들에게 김일성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려는 듯 할아버지의 걸음걸이와 연설 제스처, 심지어 뚱뚱한 외모까지 흉내내고 있다. 수시로 김일성·김정일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북한의 학교에서는 “김정은이 3살 때 총 쏘고 운전을 시작했다”는 말도 안되는 개인숭배 내용을 배우도록 했다. 주요 정책도 선대의 노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 핵심은 핵무장을 통한 강성대국 건설이다. 그는 인민들은 굶주려도 핵개발에는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며 군사력에 집착하고 있다.


아베는 어떤가. 아베는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꿈을 이루겠다며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다.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인 기시는 ‘일본 재무장’의 단초가 된 미·일 신안보조약(1960년)을 성사시킨 인물이다. 아베는 그런 기시의 뜻을 받들어 지난달 18일 의회민주주의 기본 절차나 국민 여론, 국제 사회의 우려 등은 철저히 외면한 채 힘으로 집단자위권 법안을 비롯한 안보법안을 관철시켰다. 아베는 안보법 처리 후 시즈오카현에 있는 기시의 무덤을 참배했다.


아베의 폭주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있다. 기시가 A급 전범이 아니라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다는 것을 역사교과서로 확인받고 싶어하고 있다. 일제 시대와 태평양 전쟁을 비판적으로 보는 일본 역사학계의 시각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면서 오래전부터 새 역사교과서를 추진해왔다.


아베는 1997년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역사교육 의원모임)을 주도적으로 결성해 교과서 왜곡을 주도하는 우익 학자들의 모임인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활동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 아베가 사무국장을 맡았던 이 역사교육 의원모임은 일본의 조선침략과 일본군 위안부, 독도 등의 주요 이슈에 대해 철저하게 일본 우익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검정교과서를 탄생시키는 동력이 됐다.


그런데 아베의 진짜 속내는 현행 검정교과서 제도를 국정제로 바꾸어 자신들이 바꾼 새 역사교과서로 모든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이다. 다만 검정제를 국정제로 바꾸는 것은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하는 것만큼 강한 저항이 예상되기 때문에 잠시 숨고르기를 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의 26개 시민단체들이 지난 16일 “한국 교과서의 국정화가 아베 정권이 일본의 역사 교과서 제도를 현 검정제에서 국정제로 바꾸는 구실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우리 국내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박 대통령도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는 데 강한 애착을 보여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특히 자신의 부친과 관련된 역사교과서 서술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는 듯 하다. 부친의 친일경력과 독재에 대한 비판이 과도하게 좌편향적이라는 판단에서인지 몰라도 검정제를 국정제로 바꾸려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온나라가 국론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효녀인 박 대통령은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은 분위기다.


동북아 지도자들은 틈만나면 입으로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머리와 몸은 여전히 불행했던 과거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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