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확신하던 형사과장, 실종자 주검 발견되자 "내가 졌다"

[그 사건 그 기자들] ② 30대 중장비 영업사원 실종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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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매일은 중장비 영업사원 실종사건 100일을 맞아 1997년 8월3일 1개 면을 할애해 특집기사를 실었다. 당시 이 보도는 지역 언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지난 이야기)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는 용의자 부인의 증언을 실은 광주매일 보도 이후 경찰이 구속한 택시 기사가 진범이 아니라는 의혹이 점점 커지는데….


6월 중순부터 열대야가 나타났던 1997년 여름은 7월 들어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 무렵 광주매일 2년차 사건기자 임재식은 광주시 북구 각화동에 위치한 광주교도소를 찾아갔다. 면회실 문이 열리고 유리창 너머로 한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경찰이 용의자로 지목한 택시 기사 K를 직접 본 것은 사건 발생 이후 처음이었다. 임재식을 발견한 K는 “누구요?”라고 물었다. 낮은 목소리로 “광주매일 기자”라고 했는데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유리창 쪽으로 다가오면 이래저래 왔다고 넌지시 말하려고 했는데, K는 면회실 입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도 답답해 “광주매일 임재식 기자입니다!”라고 했다. 그 말과 동시에 교도관이 임재식을 제지했고 그제야 K는 “아니, 잠깐만요”라고 했다. 임재식은 면회실 밖으로 끌려 나왔다. 실종자 부인은 경찰에 체포될 당시 멀쩡하던 택시 기사가 교도소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다며 꼭 만나보라고 했다.


택시 기사와 면회 불발로 임재식이 이으려고 했던 사건과의 연결 고리는 일단 끊어졌다. 축구대회에 나갔다가 무릎을 다쳤던 임재식의 1년 선배 박헌주는 한 달여 만에 퇴원했다. 그는 입원의 공백을 만회하기 위해 안 그래도 정신없는 사건기자의 쳇바퀴를 세게 돌려야 했다. 쉬지 않고 터지는 사건들 속에서도 그 사건은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석 달이 흘렀는데도 실종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사건, 용의자가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는 사건…. 경찰이 용의자 자백에 석 달째 붙들려 있을 때, 실종자 부인은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청와대와 감사원, 방송국 등을 찾아다니며 재수사를 호소하고 있었다. 7월 하순 어느 날, 사회부 회의에서 박헌주는 실종 사건 100일을 맞아 경찰 수사 의혹을 다각도로 짚어보는 기획 보도를 제안했다. 3년차 초짜 기자의 제안이었지만 선배들은 해보자고 했다. 1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게 선배 사건기자들의 생각이었다. 사회부장 김선출도 박헌주의 발제를 적극 수용했다.

1997년 9월30일 경찰과 가족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중장비 영업사원 사망사건 현장 검증.

◇사건 100일, 광주매일 1개면 특집기사
지역 권력과 다층적으로 얽혀 있는 지역신문에서 비판 보도를 대놓고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1997년 8월3일 광주매일은 1개 면을 할애해 특집기사를 실었다. <경찰 지목 용의자 과연 범인인가>라는 제목으로 경찰 수사의 문제점을 총정리하며 서부서 형사과장 H와 실종자 부인 B의 인터뷰를 각각 담았다.


형사과장 H는 인터뷰에서 “신이 아닌 이상 100%는 확신할 수 없지만 택시 기사가 99% 범인인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택시 기사의 자백에 의문이 많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한 그의 옷과 택시 시트에서 어떤 혈흔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강압 수사로 거짓 진술했다는 증언이 나왔는데도 택시 기사가 99% 범인이 확실하다고 단정한 것이다. 실종자 부인 B는 경찰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B는 “경찰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용의선상에 둔 사람을 진범으로 몰기 위해 짜맞추기 수사를 하고 있다”며 “애꿎은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 인권을 유린했다는 비난의 화살을 피하려고 그대로 밀어붙이고 있다”고 했다. 광주매일의 특집기사는 눈을 씻고 봐도 다른 신문에선 보이지 않는 보도였다.


1997년 4월26일 새벽에 회사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 100일 넘게 행방이 묘연한 중장비 영업사원 P의 실종 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잊혀갔다. 다른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서 터지기도 했거니와 8월3일 특집기사 이후엔 계속 끌고 가고 싶어도 더는 새로운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남편의 시신이라도 찾아 장례를 치러주면 원이 없겠습니다.” “어딘가에 버려졌을 남편의 싸늘한 모습을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실종자 부인의 하소연을 듣노라면 두 기자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괴로웠다.


서부서 형사과장 H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9월26일 저녁 9시쯤이었다. 임재식은 저녁밥을 먹고 남부경찰서 기자실로 넘어와 다음 날 쓸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기자 수첩을 넘기며 취재 내용을 검토하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내가 졌다.”
“네? 누구시죠?”
“서부서 형사과장인데, 실종된 영업사원 시신이 발견됐고 가족이 확인했다.”
“뭐라고요? 다시 한번 말해주실래요?”
“다른 용의자를 체포했는데 자백했다.”

H는 다급한 목소리로 서부서로 와 달라고 했다. 흥분한 실종자 가족들을 다독여달라는 취지였다.

중장비 영업사원의 주검은 실종 5개월 만에 한 공익근무요원의 자취방에서 발견됐다. 시신이 발견된 당일 밤 서부서에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MBC

◇영업사원 주검 실종 5개월만에 발견
임재식은 H의 전화를 끊고 실종자 시신이 안치된 보훈병원에 들렀다가 서부서로 차를 몰았다. 양동시장에서 쌍촌동으로 빠지는 농성동 돌고개 사거리 우측 언덕에 광주 서부경찰서가 보였다. 서부서는 입구부터 헤드라이트를 켜고 줄줄이 들어오는 방송사 차량으로 어수선했다. 신문사 취재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형사과로 뛰었다. 임재식도 마찬가지였다. 1층 현관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형사과 밖으로 뜨거운 오열이 터져나왔다. 실종자 부인 B는 경찰이 남편을 죽였다며 통곡하다 못해 쓰러지고, 유족들은 형사들과 몸싸움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실종자 P의 주검은 서구 농성동 단독주택에 세 들어 사는 공익공무 요원의 방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커다란 고무 물통이 의심스럽다는 주민 제보를 받고 출동해 공익요원의 자취방에서 주검을 찾아냈다. P의 주검은 여행용 가방에 넣어진 채 고무 물통에 담겨 밀봉된 상태로 있었다. 경찰은 공익요원한테서 4월26일 새벽 북구 운암동 길에서 술에 취한 행인과 싸우다 그가 떼밀려 숨지자 시신을 자신의 셋방으로 옮겨 5개월간 숨겨왔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공익요원은 주검을 여행용 가방에 넣고 보관하다가 냄새가 심하게 나자 대형 고무 물통에 넣고 실리콘으로 밀봉해 숨겨왔다. 그는 농성동으로 이사하면서 물통도 함께 가져왔는데, 혼자 사는 사람이 커다란 물통을 보관하고 있는 걸 수상하게 여긴 주민 신고로 덜미를 잡혔다.


공익요원에 대한 경찰 조사에서 P의 휴대전화 행방이 나왔다. 공익요원은 사건 이후 P의 휴대전화를 2주일간 사용하다가 동구 대인동 모 카페에서 분실했다고 진술했다. 애초 경찰은 용의자인 택시 기사가 P의 휴대전화를 사용하다가 시내 모 카페에서 분실했다고 봤다. 하지만 P의 휴대전화는 택시 기사가 아닌 공익요원이 사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종자 부인 B가 직접 통신사에 요청해 휴대전화가 27차례 사용된 것이 드러나자 뒤늦게 수사에 들어갔지만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것이었다. 택시 기사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휴대전화 사용 내역을 추적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는 말들이 경찰 내부에서 퍼졌다.

박헌주·임재식 기자는 중장비 영업사원 실종사건 보도로 제86회 이달의 기자상, 제30회 한국기자상, 제1회 엠네스티 언론상을 받았다. 사진은 1997년 11월25일 열린 제36회 이달의 기자상 시상식 장면. 왼쪽부터 임재식 기자, 이형균 심사위원, 남영진 한국기자협회장, 박헌주 기자.

◇주머니에서 나온 자동차 키 넣자 문 열려
P의 시신이 발견된 그날 밤, 임재식은 경찰과 유족을 따라 운암동 주택가 골목으로 갔다. 주검 주머니에서 나온 열쇠 꾸러미를 확인해야 했다. 가로등이 어두운 골목길에 이웃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형사가 5개월째 멈춘 자동차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부인 B가 트렁크 위로 쓰러졌다. 신랑 살려내라고 울부짖는 울음소리가 골목길에 있는 사람들의 귓속에 파고들었다. 다음 날 지역신문들은 초동수사를 소홀히 한 경찰이 짜맞추기씩 수사를 했다며 일제히 보도했다. MBC ‘뉴스데스크’는 광주MBC 기자 박수인이 취재한 리포트를 전국 뉴스로 다뤘다. B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형사들이 조금만 우리가 원한 대로 수사했으면 우리 신랑을 살아서 찾았을 거예요. 이거는 반 형사들이 죽인 거예요. 우리 신랑을요….”


진범이 잡혔을 때 박헌주는 히말라야에 있었다. 전남대 산악회 출신인 그는 그해 8월 중순 전남대 재학생과 졸업생 8명으로 구성된 히말라야 초오유 원정대에 합류해 네팔로 떠났다. 9월21일 새벽 베이스캠프를 떠나 6시간의 악전고투 끝에 서북릉을 통해 8201m의 초오유에 오른 그는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진범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10월 초순 어느 날, 남편 장례를 치른 B가 서구 화정동에 있는 광주매일로 박헌주와 임재식을 찾아왔다. 두 기자 덕분에 남편을 늦게나마 하늘나라로 보낼 수 있었다며 고마움의 표시로 양주 한 병을 내놨다.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한 게 뭐 있다고요.” 박헌주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저의 억울한 사연을 끝까지 들어주셨잖아요. 그걸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두 기자는 떠나는 B를 눈길로 배웅했다. 박헌주는 이듬해 2월 제30회 한국기자상 시상식에서 “미망인이 된 B와 세 살배기 아들의 행복을 기원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끝>


※이 기사는 1997년 당시 광주매일 기자로 일했던 박헌주씨(전남광주 중앙한의원 원장)와 임재식씨(국토교통부 순천국토관리사무소 운영지원과장) 인터뷰와 언론 보도를 토대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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