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6월3일은 12·3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반년이 되는 날이었다. 민주화 이후 첫 계엄을 선포한 전직 대통령이 파면된 날로부터 꼭 60일이 지난 때이기도 했다. 계엄(내란)이 없었으면 대통령 탄핵도 없었고, 당연히 조기 대선도 없었을 상황. 그러나 대선 기간 언론 보도에서 이런 배경과 맥락은 상당 부분 지워졌다. 어느 때보다 예외적 상황에서 치러지는 대선이 그저 21번째 대통령을 뽑는 자연스러운 순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내란은 내란이고, 대선은 대선이라는 듯이.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실천위원회는 대선을 약 한 달 앞두고 ‘2025 대선보도준칙’을 발표했는데, 그 첫 조항이 이렇다. ‘12.3 내란을 옹호하고 대통령 파면을 인정하지 않는 주장은 단호히 비판합니다.’ 이번 대선이 내란 세력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하는 장으로 악용될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각 당의 후보가 선출되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진행되면서 이는 기우에 그친 것으로 드러났다. 오히려 문제는 “계엄과 내란이 대선 쟁점에서 사실상 실종”된 그 자체에 있었다.
김도원 언론노조 민실위원장은 16일 개최한 좌담회에서 “내란이 사라진 자리는 정치권의 말싸움 중계 보도가 채웠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번 대선 보도에 대해 “그간의 선거와 다름없는 관행적인 취재와 보도가 이뤄졌다”고 총평하며 “선거 보도의 첫 번째 독자는 언제라도 보도에 항의할 각 후보 캠프가 된다는 점, 그리고 공직선거법과 각종 심의 규정이 요구하는 기계적 균형을 준수해야 한다는 제약은 이번 대선의 맥락을 잊게 만드는 구조적 한계였다”고 지적했다.
사실 관계가 분명한 사안조차 ‘판단’을 꺼리고 ‘따옴표’ 처리하거나 여야 공방으로 ‘정치쟁점화’ 하는 관행은 이번 대선에서도 반복됐다. 내란에 대한 비판조차 민주당의 입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처리하는 기사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내란 심판=민주당 지지’라는 프레임을 형성하고 관련 논쟁을 정치공방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하며 “정치쟁점에 대해 여야의 입장을 단순한 대립항으로 병치하는 것에 그치고 판단을 회피하는 것은 비단 이번 대선 보도뿐 아니라 한국 언론 보도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계엄과 탄핵을 거치며 드러난 광장의 극심한 분열이 이런 현상을 심화시켰을까. 내란 사태로 앞당겨진 이번 대선에서조차 언론은 기계적 중립에 대한 ‘강박’을 드러내기도 했다. 고정현 언론노조 SBS본부 공정방송실천위원장은 “과도한 기계적 중립 강박에 이번 대선이 내란 때문에 단행된 대선이라는 점을 까먹어 버린 것이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이런 강박은 보도량의 기계적 배분으로도 이어졌다. “여야 거대 정당 후보의 발언은 초 단위까지 맞춰서 보도”하고 다른 후보의 보도량도 여론조사 지지율에 비례해서 결정했다. 몇 초라도 차이가 나면 다음 날 각 선거 캠프에서 항의 전화가 걸려 오기 때문이다.
이런 기계적 중립조차 늘 지켜진 건 아니었다. 고 위원장은 “특정 후보를 심각하게 비판해야 할 상황이 생겨도 비판하지 못하고 정치권 공방 처리했다. 기계적 중립이 내란 비판 보도보다 우선시되는 게 지배적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내란 청산과 극복, 그 이후의 과제까지 진지하게 들여다본 언론 보도도 있었다. 짧은 기간 많은 의제를 다뤄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양당 프레임을 벗어나 진보 후보가 내건 의제까지 놓치지 않고 다룬 언론이 있었고, 여론조사를 단건으로 소개하기보다 조사기관별 여론조사 결과를 모두 종합해 ‘통합 지지율’을 추정한 몇몇 언론사의 시도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내란을 기억하는 언론일수록 종종 격앙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유경선 언론노조 경향신문지부 사무국장은 몇몇 사설을 거론하며 “설득력 있는 논거보다는 강경한 표현이 주로 담겨 ‘논평 같다’는 안팎의 평가를 받았다”고 전했다. 앞서 언론노조 MBC본부 민실위에서도 MBC의 대선 보도가 ‘내란 프레임’에 갇혀 유력 대선 후보에 대한 검증이 소홀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매일신문은 이와 반대되는 경우였다. 계엄과 탄핵 국면에서도 윤석열 전 대통령 편에서 보도를 이어온 매일신문은 대선이 본격 진행되면서 “특정 정당에 감정이입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계엄 이후 매일신문이 특정 세력을 대변하는 “격문”이 됐다는 기자들의 반발과 거듭된 문제 제기를 편집국 수뇌부가 일부 수용한 결과다. 홍준헌 언론노조 매일신문지부 자유언론실천위원장은 “민주당만 비난하는 식으로 가면 우리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자각도 있었다”며 “내란 보도 문제에 비하면 한없이 못 미치지만, 기존보다는 나아졌다고 어느 정도 긍정 평가한다”고 말했다.
김도원 위원장은 이처럼 편집국과 노조 등 구성원들이 함께 노력하면 보도는 분명 나아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에서 취재 보도하는 일선 기자들과 보도국/편집국의 개선 노력”이라며 “혼자서는 어렵지만 소속 노조, 민실위 등과 함께 하면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