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기자 지망생들, 노근리서 평화를 배우다

기협 '한일 예비언론인 포럼'

“여기 세모로 표시한 곳에는 탄환이 박혀 있어요.” 양해찬 노근리사건 희생자 유족회장이 쌍굴다리 벽에 박힌 세모 표시를 가리키자 그쪽으로 일행의 눈길이 쏠렸다. 쌍굴다리 곳곳에는 동그라미, 세모, 네모 표시 수백 개가 보였다. 1950년 7월 노근리 학살사건 당시 총탄 자국이다.


뙤약볕에 머리꼭지가 따갑던 지난 27일 오후,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에 한국과 일본에서 온 기자 지망생들이 모였다. “열 살 때였어요. 여기서 사흘 밤낮을 버티다 살아남았어요….” 양 회장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양해찬 노근리사건 희생자 유족회장(오른쪽)이 27일 사건 현장인 쌍굴다리를 찾은 한일 예비 언론인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기자협회가 주관한 ‘한일 예비언론인 포럼’ 참가자 30명이 이날 노근리 평화공원을 찾았다. 참가자들은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 안내로 평화기념관을 둘러보고 쌍굴다리를 찾아 이 주변에서 1950년 7월25~29일 미 공군기 폭격과 미군 총격으로 피란민 등 수백명이 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년 4월 요미우리신문에 입사 예정인 키타가와 호타카(호세이대학 4학년)씨는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인데도 그 실상을 잘 몰랐다”면서 “일본에선 노근리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정구도 이사장은 노근리정신 특강에서 “노근리사건은 역사전쟁이자 기록전쟁이었다”며 “피해 당사자들의 진상규명 노력과 국내외 언론 보도, 특히 1999년 AP통신의 탐사보도를 통해 세계적으로 공론화됐다”고 강조했다.


노근리사건의 진실규명 작업은 정구도 이사장의 부친인 고 정은용씨가 10여년 준비 끝에 1994년 출간한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에서 시작됐다. 국내 언론은 이 소설을 보고 그해 4월부터 노근리 사건을 취재해 보도했고, 국내 언론 보도를 접한 AP통신이 1998년 4월 본격 취재에 착수했다. AP통신 취재팀(찰스 핸리, 최상훈, 마사 멘도자 기자)은 가해 미군의 증언을 확보하고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관련 문서를 찾는 등 심층취재를 거쳐 1999년 9월 노근리 사건을 폭로한 특집기사를 냈다.


정 이사장은 “AP통신 취재팀의 보도 과정은 험난했다. 6개월 취재물은 내부 반대로 1년 넘게 기사화가 보류됐다가 ‘blood’ ‘massacre’ 등 민감한 단어는 빼고 실렸다”며 “끝까지 보도하려 노력한 AP통신 취재팀의 기자정신 덕분에 노근리사건의 진실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자를 지망하는 여러분들이 AP통신 취재팀처럼 진실의 편에 서는 언론인, 강자가 아닌 약자의 편에 서는 언론인이 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런 사실을 들은 요시다 타케토(와세다대학 3학년)씨는 “노근리사건을 처음 얘기한 건 피해자들이었고 언론이 이를 연결해준 것”이라며 “숨겨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선 언론이 피해자들과 연결되는 게 중요하지 않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2. 27일 노근리 평화공원을 찾은 한일 예비언론인들이 위령탑에 헌화·분향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일 예비언론인 포럼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폭로한 우에무라 다카시 주간금요일 발행인(전 아사히신문 기자)이 주도해 2017년부터 시작했다.


한일 양국 언론인 지망생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자는 취지로 히로시마, 광주, 후쿠오카, 오키나와 등에서 열렸으며 지난해부터 한국기자협회가 파트너로 참여했다. 30일까지 제주 4·3평화공원 등에서 진행되는 이번 포럼에는 일본 예비 언론인 14명 등 30명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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