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위원회가 TV수신료를 전기요금과 분리해 징수하도록 하는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5일 의결했다. 방통위 상임위원 정원 5명 가운데 3명만 재임 중인 상황에서 정부‧여당 측 김효재 방통위원장 직무대행과 이상인 위원이 원안에 찬성했다. 야당 측 김현 위원은 개정안의 내용과 처리 절차에 반발하며 표결에 참여하지 않고 회의장에서 퇴장했다.
방통위는 이날 열린 전체회의에서 방송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을 심의‧의결했다. 방송법 시행령 제43조 2항 ‘지정받은 자(한국전력)가 수신료를 징수할 때 고지행위와 결합해 행할 수 있다’는 조항을 ‘행해서는 아니 된다’로 개정해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통합해 징수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방통위는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별도로 고지‧징수함으로써 국민이 수신료 징수 여부와 그 금액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게 된다”며 “수신료 납부 의무가 없는데 잘못 고지된 경우 바로 대처할 수 있게 돼 국민 불편을 해소하고, 전기요금과 수신료를 분리 납부하고자 하는 국민의 선택권을 보장한다”고 개정안의 취지를 밝혔다.
분리징수 논의는 대통령실 주도로 시작됐다. 대통령실은 지난 3월9일부터 4월9일까지 온라인 투표 방식의 국민참여토론에 ‘수신료 징수방식 개선’을 안건으로 올렸다. 찬반 투표 결과 징수방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96.5%로 집계됐다. 다만 과학적 설계에 따른 여론조사가 아니었고 SNS 로그인 방식으로 한 사람이 여러 번의 투표를 할 수 있어 신뢰도 문제가 제기됐다.
그럼에도 대통령실은 지난달 5일 ‘찬성 96.5%’를 근거로 방통위와 산업통상자원부에 수신료 분리징수를 권고했다. 관련 법령 개정과 그에 따른 후속조치를 위한 이행방안을 마련하라는 주문이었다. 당시 대통령실은 “국민참여토론 과정에서 방송의 공정성 및 콘텐츠 경쟁력, 방만 경영 등의 문제 지적과 함께 ‘수신료 폐지’ 의견이 가장 많이 제기된 만큼 국민 눈높이에 맞는 공영방송의 위상과 공적 책임 이행 보장방안을 마련하라”고 했다.
이후 방통위는 지난달 16일부터 26일까지 관계부처 의견조회와 사전영향평가, 입법예고를 거쳐 개정안 원안을 확정했다. 국무조정실 규제심사에서 ‘비대상’으로 분류돼 별도의 규제심사를 거치지 않았다. 5일 방통위 의결에 따라 법제처 심사, 차관회의, 국무회의, 대통령 재가를 거치면 개정안은 바로 공포되고, 그 즉시 시행된다.
김현 위원은 5일 전체회의에서 “방통위가 먼저 개정안을 규제심사 비대상으로 선정해 국무조정실에 보고했고, 바로 당일 승인받았다”며 “방통위는 2008년 설립 이후 줄곧 수신료 분리징수가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밝혀왔는데, 객관적 근거와 법률 자문도 없이 분리징수가 맞다는 억지 논리를 펴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의 지적에 방통위 방송정책기획과 수신료 담당자는 “그 당시 방통위원장 방침에 따라 정책 방향성을 결정했다”고 답했다. 역대 방통위원장들은 수신료 분리징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현 김효재 위원장 대행은 분리징수에 찬성하기 때문에 방통위도 같은 의견으로 바뀌었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김현 위원은 “수신료 징수 위탁자인 KBS와 수탁자인 한전 모두 분리징수가 가장 합리적인 제도이고 법령이 공포되더라도 대책을 마련할 유예기간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그런데 원안대로 공포 직후 시행하는 것은 오히려 대통령실이 권고한 ‘공영방송의 위상과 공적 책임 이행 보장방안을 마련’에 반하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이어 김 위원은 “유독 이번 개정안만 어떤 설명도 없이 연구반, 의견 청취, 진술, 법률검토를 건너 뛰었다”며 “방통위 상임위원 정원 5인 중에 2인의 표결만으로 의결이 이뤄지는 것이 방통위 설치법에 맞는 건가. 용산 비서실의 하명을 받아 졸속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의결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밝히며 퇴장했다.
김효재 방통위원장 직무대행과 이상인 위원은 수신료 분리징수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원안에 찬성했다. 김 직무대행은 “KBS는 공정성 논란과 방만 경영 문제로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KBS가 수신료를 얼마나 헤프게, 알뜰하게 썼는지 국민은 물어볼 권리가 있고 분리징수가 그 단초가 될 것이다. KBS는 언제부터 어떻게 공정성 논란을 자초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방통위 의결 결과에 입장을 낸 KBS는 “대통령실 권고안의 근거가 된 온라인 투표 결과의 정당성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시행령 개정 과정에 절차적 문제가 많았다”며 “입법예고는 통상 기간의 1/4인 10일에 불과했고 행정입법에 필요한 사전영향평가나 규제심사, 법제처장 협의 등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알려진 바 없다”고 했다.
KBS는 “당사자인 KBS의 의견진술 요청은 이유 없이 거부됐고 징수비용 급증과 현장의 혼란을 우려하는 한전의 의견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지난 30년간 가장 효율적으로 공영방송을 지탱해 온 재원 조달 체계를 최소한의 사회적 논의나 대안 마련도 없이 극도로 긴박하게 폐기해야만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KBS는 자구 노력을 이어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충분한 숙고와 토론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KBS는 “지금이라도 입법예고 기간에 제출된 국민 의견들을 비롯해 학계와 시민사회, 지역사회 등에서 쏟아지는 우려를 차분히 경청해달라”며 “일방향의 긴박한 진행은 잠시 멈추고 원만한 사회적 합의를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해주실 것을 정부당국과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호소드린다”고 했다.
한편 언론현업단체과 언론시민단체들은 방통위 의결에 앞서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정권은 수신료 분리고지(징수)를 포함한 언론 장악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5일 방통위가 있는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방통위를 앞세워 윤석열 정권의 노골화되고 있는 미디어 장악 시도의 첫 전장이 된 수신료 문제에 맞서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 싸움을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