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자유는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큰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4월 당선자 신분으로 참석한 신문의 날 기념식에서 했던 말이다. 1년이 지난 현재, 우리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윤창현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은 12일 과천 방송통신위원회 앞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결국 이런 상황이 오고 말았다. 임기 시작과 동시에 언론자유를 짓밟고 통제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방송장악을 시도한 윤석열 정권이 30여년간 유지돼 온 TV수신료 징수 문제를 건드렸다.”
방통위, 대통령실의 분리징수 권고 일주일 만에 법령 개정 절차 착수
방통위는 대통령실의 수신료 분리징수 권고 일주일 만에 관련 법령 개정 절차에 착수했다. 방통위는 12일 개최한 비공개 상임위원 간담회에서 수신료 분리징수 추진계획을 논의했고, 14일 전체회의에 분리징수안을 보고안건으로 올리기로 했다. 보고안건 상정은 입법 절차 돌입을 의미한다.
정부가 수신료 분리징수를 위해 가장 먼저 바꾸려는 법령은 ‘방송법 시행령’이다. 이 가운데 제43조 2항은 ‘지정받은 자(한국전력)가 수신료를 징수할 때 고유업무와 관련된 고지행위와 결합해 행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한전이 전기요금 고지서에 ‘수신료’를 명시해 통합징수하는 근거다. 시행령은 보통법과 달리 국회를 거치지 않고 관계기관(이 경우 방통위)의 입안으로 비교적 쉽게 개정할 수 있다. 정부는 해당 조항의 문구를 ‘고지행위와 결합해 행해선 안 된다’로 바꾸면 분리징수를 시행할 수 있다고 본다.
KBS 측 “수신료 징수방식 변경, 대통령실·방통위 소관 아닌 국회 몫”
KBS의 판단은 이와 다르다. 수신료 징수방식 변경은 대통령실과 방통위 등 행정부 소관이 아니라 국회의 몫이라는 것이다. KBS 공영미디어연구소는 13일 발간한 ‘미디어 핫이슈’에서 ‘수신료 금액은 입법자인 국회가 스스로 정한다’는 헌법재판소 판결을 인용해 “정부가 추진하는 방송법 시행령 개정으로 수신료 분리징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정부의 분리징수 추진에 법적, 절차적 논란이 이는 상황에서 방통위의 행보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특히 현재 방통위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방통위원 정원은 위원장을 포함해 총 5명이지만, 재임 중인 위원은 여야 2대1 구도로 3명뿐이다. TV조선 재승인 점수 고의감점 사건으로 기소된 한상혁 위원장이 지난달 30일 면직됐고, 야당이 추천한 위원 후보는 석 달째 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못해서다. 오는 8월23일 임기를 마치는 김효재 위원(여당 추천)이 3인 체제에서 위원장 대행을 맡고 있다.
방통위 상임위원 가운데 유일한 야당 추천 인사인 김현 위원은 12일 입장을 내어 수신료 분리징수의 부당성과 절차상 문제를 지적했다. 김 위원은 “법 또는 시행령을 개정할 때는 개정 필요성에 대해 보고하고 다양한 논의와 협의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방통위의 독립성과 합의 정신을 망각하고 대통령실 권고사항이라는 이유로, 상임위원에게 내용 보고 없이 간담회 논의와 위원회 회의 안건으로 상정하는 것은 절차상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이런 와중에 대통령실이 차기 방통위원장으로 이동관 대통령실 대외협력특보를 유력하게 고려하는 것도 비판받는 지점이다. 정치권에선 이 특보 아들의 학교폭력 문제로 공방을 벌이지만, 언론계에선 이 특보의 이력이 방통위원장에 부적합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이 특보는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 홍보수석, 언론특별보좌관 등을 지냈다. 현 여당의 전신인 새누리당 소속으로 2012년 서울 종로, 2016년 서울 서초을에 공천을 신청했다가 탈락하는 등 정치판을 기웃거린 정치인이다. 반면 방송·통신 관련 업무 경험은 전무하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지난 7일 논평에서 “이 특보는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을 대변하고 권력을 홍보하며 언론을 통제했다. 그 이후에는 공천에 도전하고 권력 주위를 맴도는 정치낭인이었다”며 “방통위원장에게 요구되는 자질과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더군다나 대통령의 현직 특보인 자를 방통위원장에 내정하다니 정치적 간섭을 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방통위원장 면직과 차기 인사, 수신료 분리징수, 지난달 MBC 뉴스룸 압수수색 시도, 그에 앞서 YTN 공기업 지분 매각과 MBC 취재진 대통령 전용기 탑승 불허 등.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불과 1년 만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두고 정권이 방송장악 의도를 드러냈다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이다.
이호찬 언론노조 MBC본부장은 12일 방통위 앞 기자회견에서 “수신료 분리징수는 명백한 공영방송 장악 시도이자 길들이기다. 과연 이 정부가 이야기했던 자유이고 공정이고 상식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정권의 압박은 MBC, YTN, EBS 등 공영방송 전반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이런 시도는 반드시 국민적인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사회각계 원로 20여명은 13일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윤 대통령을 향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정정당당하게 언론을 대하라”며 “법보다 더 무서운 국민의 심판, 역사의 심판은 어찌 감당할 셈인가. 대한민국 언론자유 또한 수많은 언론인과 국민의 피와 땀으로 이뤄낸 결과물이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 앞에 겸허하기를 진정으로 충고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