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조직부장은 지난달 7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있었다. 옆엔 도시가스 안전점검원, 그러니까 서울도시가스분회 조합원 등이 함께였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참석한 패션쇼가 예정대로 진행됐고 이들은 지난 수개월 간 해오던 말을 다시 외쳤다. ‘도시가스 노동자 산정임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서울 도시가스 사업은 회사 5곳이 안전점검과 검침, 송달 등 업무를 총 60여개 고객센터 업체에 위탁해 운영된다. 인허가권이 있는 서울시는 매해 가스요금, 고객센터 지급수수료 기준은 물론 인건비도 책정하는데 고객센터에 고용된 하청노동자 점검원들은 산정임금보다 10~20만원 가량 적은 월급 200~210만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박 조직부장은 지난달 27일 인터뷰에서 “연봉 1억인데 100만원 깎였다고 이러겠나. 인허가권을 가진 서울시는 하청 노동자 인건비가 중간착취 되는데 이를 어긴 고객센터 운영업체와 방조한 도시가스 회사에 사업권 박탈이나 고소고발을 하지 않았다. 시민들 도시가스 요금이 중간에 샌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도둑질을 돕는 격 아닌가. 이게 ‘약자와의 동행’인가”라고 했다.
누군가는 꺼려하고 누군가에겐 낯설고, 또 다른 이에겐 버팀목인 ‘조직부장’ 직함이 그의 일을 대변한다. “문제 없는 사업장은 없다.” 노조는 조합원들과 해법을 고민하고 함께 투쟁하고 사측과 교섭에서 요구를 관철한다. 그가 몸담은 노조 상급단체는 이 과정에 함께 한다. 특히 이를 가능케 하는 토대, ‘조직의 강화와 확대’가 그의 임무다. 지난 5월부터 공공운수노조에 몸담았고 동료 활동가 20여명과 일해 왔다. 서울지부엔 도시가스 안전점검원, 대학 청소노동자 등 비정규직, 하청노동자 3000여명이 속해 있다. “처음 노조 가입할 때 떨리고 그러잖아요. 사람이 모였으니 ‘같이 투쟁 안했던 사람을 이제 받아줘?’ ‘쟤 갈라섰잖아’ 같은 정서도 있고요. 교섭, 투쟁도 힘들지만 사람을 모으고 화해시키고 단단하게 하는, 사람 관련 일이 제일 힘들더라고요. 계속 만나서 관계를 고양하고 발전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2011~2014년 미디어오늘, 2014~2016년 미디어스 기자로 지냈다. 기자는 “양심을 속이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직업”이라 생각했다. 업계 노동문제, 방송통신정책 분야에 관심 가져온 그는 집요하고 끈질긴 취재로 정평난 기자였다. 몇몇 사건으로 실망해 각 사를 떠나기 전까지 공무원 등 취재원에게 100~200번씩 전화를 하고, ‘단독’도 많이 하는 언론인으로 지냈다.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렇게 살았고 기사도 열심히 썼는데 한편으론 ‘나만 기자다’란 위험한 생각에 많이 젖었던 거 같아요. 받을 때까지 전화했다가 ‘스토킹 하지말라’는 말도 들었는데 제가 무례했어요.(웃음) ‘쿠팡 노조 술판’ 등 보도를 보면 안타까워요. 젊은 기자들이 썼을 텐데 영혼을 판 게 아니라 게을렀다고 생각합니다. 수집된 팩트를 회사 논조에 타협한 건데 더 취재했으면 틀리지 않고 타협선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싶죠.”
기자시절 현 경로에 큰 영향을 미친 ‘씨앤앰(현 딜라이브) 사태’가 있었다. 사모펀드 ‘먹튀’에 맞서 케이블TV 노동자들이 2014년 5월부터 12월까지 투쟁했고 “똑같은 말이라도 매일 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마음으로 기사 100여건을 썼다. 미디어스를 그만둘 때 이를 주도한 조직, 희망연대노조(희망연대)가 떠올랐다. 현재 케이블방송과 통신, 콜센터 등 전국 단위 비정규직 사업장 6000여명이 조합원으로 있는 희망연대는 당시 “비정규직이 해고됐는데 원청 정규직들이 점거를 하고 한 달 동안 파업을 하는” 싸움을 했다. 간부로 지원했고 2016년 11월부터 약 5년 간 정책국장, 조직국장으로 활동했다.
현 직장은 돌고 돌아 ‘첫 노조’로 돌아온 셈이다. 2003년 대학에 입학한 그는 99학번 선배 꾐(?)에 넘어가 학내 청소노동자 근로여건을 개선하는 학생모임 ‘불철주야’(불안정 노동 철폐를 주도할 거야)의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새벽에 근로여건 실태조사를 했다. 쉼터를 찾아 관계를 쌓았다. 인권운동사랑방,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와 조직사업을 벌여 고려대미화원협의회를 결성, 결국 노조를 만드는 성과도 거뒀다. 지난 1일부터 그는 고려대, 인덕대, 광운대, 덕성여대 등 4개 사업장을 맡는다. 모두 서울 사업장이라 일상적으로 더 자주 조합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이직 주요 이유였다.
“제 인생에서 (결혼 빼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에요.(웃음) 20년 만에 다시 관여하고 보니 달라진 게 없었어요. 학생대표로 청소 용역업체 선정 회의에 들어가서 10곳 중 2곳이 혁신 방안으로 ‘법정 최저임금 지급하겠다’ 해서 열을 냈는데 지금도 최저임금 아니면 200원 더 줘요. 언론단체·언론사가 있는 한국프레스센터 지하 3층 청소 노동자 휴게실에 대해 2016년 기사를 썼는데 여전히 창문 없는 지하, 주차장 옆 시설이고요. 계속 싸울 수밖에 없어요.”
직장을 옮길수록 임금이 줄고 일은 많아진다. 노동자로서 중요한 문제지만 그는 더 중요한 걸 품고 사는 사람이다. “부르는 곳이 너무나 많아서 노조 활동가는 대충 살 수 없다”고 그는 믿는다. 스스로를 여전히 “비겁하다”고 하고, “월급은 줄었지만 기자보다 만족한다”고 말한다. “전 자존감이 엄청 높은 사람인데, 아주 조금씩 매일 혹은 매년 조금씩 나은 사람이 되는 거 같아요. 그럴 수 있는 가장 좋은 조직, 환경이 제겐 노조고요. 저도, 우리 조합원도 바뀌는 게 전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일 혁명을 경험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