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의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그가 다니던 학교에 장애인대학생체육대회가 열렸다. 한창 사진을 배우고 있던 그는 체육대회 사진을 찍자고 마음먹었다. 필름도 사고 렌즈도 빌려서 잔뜩 사진을 찍겠노라 다짐하며 운동장에 갔다. 결과적으로 그는 그 날 단 한 장의 사진도 찍지 못 했다.
장애를 가진 이들이 신나게 축구하며 넘어지고 서로 부축해주는 모습을 감동스럽게 지켜보면서 그는 자신이 카메라를 들고 운동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저 평화와 축제 분위기가 깨질까 주저했다. 그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은 상황에서 사진을 찍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 스탠드에서 일어나 나가는 것도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아 그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 했다. 돌아오는 길, 그러나 그의 기분은 상쾌했다. 사진이란 이런 것이구나, 또 다른 매력을 느꼈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 대표가 사진에 푹 빠진 날의 기억은 이랬다.
그의 인생은 이후 사진으로 점철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공은 디자인이었지만 취업 준비가 꼬이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에 눈을 떴고 자연스레 언론사 사진기자는 어떨까 생각했다. 중도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해 1997년 ‘말’지로 옮긴 후엔 말 그대로 “날아갈 듯이” 일했다. “정말 신나게 일했고 주말에도 쉬지 않았어요. 늘 집회현장, 노동현장에 갔고 재개발 지역엔 아예 가서 살았어요. 북한도 많이 갔고 제 독자들도 생겼죠. 제가 그렸던 기자 생활에 도달했던 거고 너무 행복했던 것 같아요.”
새 편집국장과의 불화는 그러나 그의 인생을 또 한 번 뒤흔들었다. 말지를 퇴사했고 큰 회의감에 사진을 그만둘 결심도 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폐암에 걸렸다. 엄하고 늘 바깥으로 돌기만 했던 아버지와 병원을 다니며 임 대표는 다시 사진기를 들었다. 투병부터 임종까지 두 달여간을 기록으로 남기며 사진에 대한 생각이 변했고, 사진으로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2002년 한겨레신문에 경력기자로 입사한 뒤에도 그 생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독거노인, 노동자, 장애를 가진 분 등 소외계층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지도록 하는 게 기자로서 할 일이라고 봤는데, 그러다보니 늘 그들의 고통에 중심을 맞춰 사진을 찍었어요. 독거노인은 고독하게, 장애를 가진 분은 신체장애를 부각시켜 찍었죠. 이분들과 얘기도 좀 하고 호흡하면서 느리게 찍고 싶은데 그냥 빨리 가서 마감해야 하고. 큰 조직이라 이라크전 같은 경험도 할 수 있었지만, 역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해야 사진을 하는 사람으로서 행복할 수 있을까 고민이 커진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이라크전 취재 후 마음의 정리가 안 되던 무렵, 아는 수녀의 조언으로 훌쩍 떠난 캄보디아는 결국 그에게 퇴사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고정관념에 대한 고민이 컸던 때라 에이즈 환자를 만나도 악수하고 밥도 같이 먹어야지 생각했는데, 뼈만 남은 에이즈 환자를 보고 놀라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했다.
결국 그는 2006년 회사를 나왔고, 이후 1년 반 동안 캄보디아에서 도시빈민촌과 시골 오지마을을 돌며 무료로 사진을 찍어 나눠주는 일을 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까지도 개발도상국 주민들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15일부터 내달 15일까지 열리는 ‘삶이 흐르는 강 MEKONG’ 전시회도 그 중 하나다. 그는 6개국 전시 참여자 107명의 사진 2392점을 살피고 재구성하는 데 지난 1년을 꼬박 보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일은 단연 사진치유와 관련한 일이다. 2005년 한겨레 휴직 때 후천적 정신장애를 갖게 된 5명의 환자와 매주 사진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임 대표는 사진이 가진 치유의 힘을 믿게 됐다. 캄보디아에서 돌아오며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사진치유였다. 그는 1년을 들여 사진심리상담사 1급 자격증을 땄고 대학원에서 상담심리교육 석사 학위도 취득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아픈 이들을 많이 만났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 70·80년대 간첩조작 피해자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 뿐 아니라 장애를 가진 이들이나 가정폭력 청소년들과 만나며 사진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했다.
“사진치유는 ‘대면’이에요.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내면에 쌓인 어두운 감정과 당당히 맞대응하는 거죠. 발가벗겨져 고문당했던 공간을 여러 차례 마주하면서 자기의 기분으로 바꿔내도록 하는 과정, 그럼으로써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힘을 스스로 살려내는 거예요.” 특히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들과는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매주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5·18 선생님들이 저를 상담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성장시켜주셨어요. 저도 처음에 동정심이나 연민의식이 왜 없었겠어요. 스스로 많이 깨지고 그러면서 상담자로 많이 성장했어요.”
자칭 ‘사진치유자’인 임 대표에게 그렇다면 사진은 ‘치유’나 ‘대면’의 의미일까. 그는 오히려 ‘사랑’이라고 답했다. “언론사를 떠나고 긴 시간 찾아 헤맨 후 세우게 된 제 삶의 원칙이 사람이 우선인 사진이에요. 어려운 상황에 놓인 이들이 슬프거나 고통스럽기만 한 단편적인 존재가 아니라, 기쁨과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제게 사진이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