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호표 전 동아일보 기자는 봉사활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대학 재수생 시절, 강원도 탄광에서 몇 달간 한 교육봉사가 전부였다. 큰아들이 10개국에서 의료·보건 봉사를 해도, 아내가 파우치, 스카프 등을 직접 만들어 17년간 병원에 기증해도, 봉사활동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큰아들 말을 빌리면 “애 같은 아버지”였다.
예상치 못한 봉사단원의 길을 제시한 건 큰아들이었다. 2015년 4월, 만 36년 8개월을 일한 동아일보에서 정년퇴직한 그는 오랜만의 휴식을 즐기기 위해 큰아들이 있는 우간다의 음발레 지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 달 간 거주하며 큰아들과 외국인들의 봉사활동을 보면서 그는 다시금 봉사에 대해 생각했다. 큰아들도 적극 추천했다. 잘 알지도 못했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봉사단원에 지원하기로 결심한 배경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신문사에서 일했고 박사학위까지 있었지만 봉사단원이 되기 위해선 자격증이 하나라도 있어야 했다. 그는 연세대 부설 한국어교사연수소에서 5주간 한국어교원양성과정을 듣고 한국어교사 3급 자격증을 땄다. 합격률 10%대 후반의 쉽지 않은 시험이었지만 과락이 높다는 한국문화 과목에서 문화부 기자의 실력을 발휘해 단번에 합격할 수 있었다. 남은 것은 봉사단원에 선발되는 일뿐이었다. 홍 전 기자는 “코이카에서 두어 달에 한번씩 봉사단원을 선발하곤 했는데 대부분 경력을 원하더라”며 “신입을 받아주는 곳이 태국, 우즈베키스탄, 스리랑카 세 군데밖에 없었다. 그 중 스리랑카가 1지망이었는데 다행히 합격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지난 2017년 5월 그는 일반봉사단원으로 스리랑카에 파견됐다. 두 달 간은 수도 콜롬보에서 사전 교육을 받았고 직후 우리나라 시골 읍 같은 분위기가 나는 도시 와라카폴라에 있는 기능대학에서 2년간 한국어를 가르쳤다. 매일 4시간씩 일주일에 20시간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이었다. 홍 전 기자는 “1년에 20여명씩, 총 4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며 “우수한 학생들은 6개월이면 어느 정도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제자 한 명은 시골 학교 출신임에도 4개월 만에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3위로 입상까지 했다”고 자랑했다.
평생을 기자로 살았음에도 가르치는 일은 즐거웠다. 가르치는 기술은 다른 사람보다 떨어질 수 있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과 한국 사회를 압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누구보다 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생소한 나라에서의 체류 생활도 몸에 잘 맞았다. 한국 사람 한 명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생활비 500달러로 한 달을 지내야 했지만 매일이 즐거웠다고 그는 말했다. 홍 전 기자는 “봉사도 봉사지만 사실 재밌었다”며 “눈 뜨고 일어나면 어떤 새로운 것이 있을까 기대되고, 사람들은 뭘 입고 다니는지, 특별한 행사는 없는지 궁금했다. 기자들이 ‘노마드(유목민)’ 기질이 있지 않나. 다른 기자들도 아마 잘 적응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현지에서 배운 싱할라어로 다양한 스리랑카인들을 만나 대화하고, 그들의 문화를 취재해 최근 <제가 스리랑카에서 살아봤는데요>를 펴내기도 했다. 스리랑카의 생활양식과 문화, 국제개발협력에 관해 그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담은 책이다. 홍 전 기자는 “봉사 가기 전부터 책을 쓰려고 생각했다”며 “인터넷에 나와 있는 일반적인 여행 정보로는 스리랑카 사회를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나. 직접 현지인들과 부딪히며 그들에게 정보를 얻고 싶었다”고 했다. 현재 한국에서 잠시 쉬고 있는 그는 내년에 또 다시 해외봉사활동을 나갈 계획이다. 홍 전 기자는 “남미, 중미, 동남아 어디든 좋다. 나라는 중요하지 않다”며 “어디든 사람 사는 이치는 똑같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