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리의 묵시록을 읽는 이유

[스페셜리스트 | 문학·출판] 어수웅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지난 주말 조선일보 Books의 ‘세계의 베스트셀러’ 코너는 핀란드 순서였다. 1위는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세계적 베스트셀러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특이한 건 핀란드어 번역서가 아니라 영어본이었다는 점이다. 아직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시적 현상이라지만, 이 역사학자·문명비평가에게 쏟아지는 이례적 열풍의 북유럽적 사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에서 하라리에게 ‘문명비평가’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스스로도 자처하고 있는 바다. 지난 3월 이스라엘 자택에서 가졌던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하라리는 옥스퍼드 출신 역사학자로서의 정체성과 문명비판가로서의 정체성을 함께 의식하고 있었다. 그 방증 중 하나가 실리콘밸리와의 불화다. 당시 ‘호모 데우스’가 미국에서 막 번역출간된 시점이었는데, 유발 하라리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대해 이 ‘디지털 유토피아’가 격렬히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우울한 문체로 예언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데이터교(敎)의 도래’다. 신의 시대였던 중세를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이 대체했듯, 다가올 미래에는 데이터에 대한 숭배가 휴머니즘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데이터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인간의 가치가 평가될 것이라는 예측인데, 현대인이 보내는 24시간을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본다면 크게 놀랍지도 않다. 네이버냐 구글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인 검색 인생, 주목받고 싶은 인생이라는 판타지를 실현시킨다고 착각시키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내 취향을 자발적으로 공개한 덕에 내 지갑을 자유자재로 강탈해가는 아마존 등등. 실제로 2017년 현재 전세계 시가총액 1위부터 5위까지의 회사들이 하나같이 빅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는 미국 기업들이다. 애플, 알파벳(구글 지주회사),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페이스북이 순서대로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 그 때 1위부터 5위까지는 페트로차이나, 엑슨모빌, 제너럴일렉트릭, 차이나모바일, 중국공상은행. 석유나 전기 등 전통의 굴뚝기업이 중심이었다. 10년 새 가장 가치있는 자원은 석유가 아니라 데이터로 넘어간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하라리를 읽다보면 그는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학자라는 뜻이 아니라, 마치 자신은 인간이 아닌 듯 다른 종(種)의 시선으로 차갑게 인간을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휴머니즘에 대한 일고의 연민이나 배려도 없는 서술이 특히 그렇다.


디스토피아로 미래를 그려내는 작가주의 영화에 대중의 관심이 차갑듯, 신성불가침이라고 자부했던 인권과 휴머니즘을 이렇게 독한 소리로 비판하는 학자를 환영하기란 쉽지 않은 일. 게다가 빅데이터 기업에 대한 쓴소리를 반복하고 있는 하라리를, 실리콘밸리 입장에서 마뜩찮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라리가 인용하면서 동시에 부정하겠다는 법칙이 있다. 러시아 문호의 이름을 빌려온 체호프의 법칙이다. “연극의 1막에서 등장한 총은 3막에서 반드시 발사된다.” 무대에서는 이 법칙이 옳았지만, 현실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냉전의 1막에서 등장했던 총은 아직까지 발사되지 않았다는 게 하라리의 설명이다. 물질 기반에서 지식 기반으로 경제로 바뀐 덕에 전쟁의 필요성이 감소하였고, 역설적으로 핵의 존재가 재래식 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줄였다는 설명이다.


데이터교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멸종가능성에 대한 경고, 인본주의 신앙의 강력한 비판이야말로, 역사의 3막에서도 휴머니즘을 생존시킬 수 있는 예방주사가 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 대목이야말로, 이 종말론적 묵시록을 읽어야 할 근본적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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