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신문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지역신문과 그 종사자들이 늘 애틋하다. 아쉬운 보도를 만나도 그 뒤의 어려움부터 떠올리게 된다. 쓴 기자 자신은 얼마나 아쉬웠을까 싶어서다.
그런데 최근 한 지역신문의 공판 기사는 내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발달장애인 자매를 성폭행·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장애인 교육시설 전 교장의 재판이다. 기사는 리드부터 결말까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는 피고인 측 주장으로 채워져 있다. 변호인은 증인마다 피해자가 평소 감정기복이 심했는지 묻는다. 피고인의 배우자이자 피해자가 다니던 기관의 대표는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고 답한다. 기사는 이 문답을 그대로 옮겼다.
이상했다. 왜 이렇게 썼을까. 앞선 기사를 찾아봤다. 9월 기사도 다르지 않았다. 피고인 측이 피해자의 진료기록을 요구하며 정신질환을 거론한 발언이 길게 실렸고, 정신질환과 거짓말을 연결하는 변호인의 말이 마지막 문장이었다.
법정에서 피고인 측이 피해자 진술을 다투는 것은 정당한 방어권이다. 재판부도 반대신문권이 헌법상 권리라는 점을 짚었다. 검찰은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피해자가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맞섰다. 법은 이런 피해자를 위해 영상 녹화 진술 같은 보호 장치를 두고 있다. 기사가 전해야 했던 것은 이 긴장이다. 변호인의 말을 옮기더라도, 그 질문이 피해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법이 왜 보호 장치를 두었는지를 함께 써야 했다.
받아쓰기는 법정 기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방의원의 발언은 의회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확인 없이 지면에 오른다. 행정 기사도 비슷하다. 주민들이 미리 우려하고 반대했던 정책에서 문제가 터져도, 기사는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다, 노력하겠다”는 담당 공무원의 말로 끝난다. 신문이 그 우려를 직접 보도한 적이 있는데도 그렇다. 잘못이 분명한 일을 ‘논란’이라 부르고 “점검하겠다”는 답으로 맺기도 한다. 그런 ‘쓰기’ 속에서 행정의 책임은 자연스레 묻힌다. 힘이 다른 두 쪽의 말을 나란히 놓는 것은 중립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기사는 힘센 쪽으로 기운다.
받아쓰기 비판은 새롭지 않다. 그런데도 왜 사라지지 않을까. 나는 이 기사들이 서툴러서가 아니라 ‘정석대로’ 써서 문제가 됐다고 본다. 발언을 옮기고, 양측 입장을 나란히 놓고, 당국의 계획으로 맺는 것은 중앙 언론이 오래 써온 문법이다. 언론학에서는 남의 말을 따옴표로 옮겨 객관성을 대신하는 이 관행을 ‘한국형 형식적 객관주의’라 부른다. 이 문법을 정석으로 배우고 기사 ‘쓰기’ 자체에 매몰되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채기 어렵다. 한국기자협회가 ‘성폭력·성희롱 사건보도 공감기준 및 실천요강’에 ‘형식적인 객관주의’를 경계하라고 굳이 적어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지역에서는 이 문제가 더 무겁다. 작은 공동체에서 피해자는 익명이 아니다. 어느 기관의 누구인지 이웃들은 이미 짐작한다. 그 위에 정신질환 이력과 감정기복이 활자로 얹힌다. 공감기준은 질병 같은 피해자의 사생활이 알권리의 대상이 아니라고 적는다. 진술 신빙성 공방은 법정에서 할 일이다. 맥락 없이 옮기면 지면이 또 하나의 법정이 된다. 기사 ‘쓰기’에만 집중하는 기자에게 피해자는 취재원이지만, 기사가 나간 다음 날에도 그 동네에서 ‘살아갈’ 기자에게는 이웃이다. 정책의 뒷감당을 이웃으로 함께 겪을 기자라면 “몰랐다”는 말로 기사를 맺지도 않을 것이다.
지난 7~8년 사이 지역신문 편집국에서 ‘기사로 싸운다’는 감각, 곧 힘 있는 쪽에 따져 묻는 감각이 옅어졌다고 나는 느낀다. 기자 개인의 사명감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서 일하려는 기자는 줄고 신문사 경영은 나빠졌다. 사람이 오래 남기 어려운 구조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지역 감수성을 물려줄 선배가 떠난 자리에는 교과서의 문법만 남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개인의 각오에 기댈 수 없다면, 지역에 ‘사는’ 사람의 감각을 편집국의 기준으로 만들어야 한다. 데스크는 기사를 내보내기 전에 적어도 네 가지를 물어야 한다. 피해자의 사생활이 불필요하게 드러나지 않았는가. 한쪽 주장이 첫 문장이나 마지막 문장을 차지하지 않았는가. 권력의 해명을 우리 신문의 과거 보도와 대조했는가. 당국의 ‘사탕발림’ 같은 다짐으로 기사를 맺지 않았는가.
나는 기자에게 활동가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느 한쪽 편을 들라는 말이 아니다. 힘 있는 쪽에 확인을 요구하고, 지역의 문제를 끈질기게 다루고, 그 문제를 함께 풀 공론장을 여는 일이다. ‘기사로 싸운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지역신문은 바로 그 일을 하라고 있는 신문이다. 그래서 이 기사들이 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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