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고 잠기는 땅 위에 세우는 800조의 신기루

[언론 다시보기] 박누리 농촌 기록 활동가

용인반도체산단 재검토·송전탑 반대 전국행동이 7월30일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해남군청 앞에서 3주간의 대장정을 알리는 출정식을 열고 이재명 대통령의 응답을 촉구했다. /환경운동연합 제공

지역을 기록해 온 지 여러 해다. 지명과 풍경만 다를 뿐, 가만히 들여다보면 전국 각지에 비슷한 이야기가 많다. 산업단지가 들어서고, 송전탑이 세워지고, 누군가는 그것을 성과라며 자축하고, 사람은 뒤로 밀려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성장’을 최고로 여기는 사회에서, 농촌이 삶의 기반임을 망각한 채 반복적으로 희생시켜 온 역사다. 요즘 흔히 듣는 ‘메가프로젝트’에 얽힌 장면도 그 연장선에 있다.


6월29일 이재명 정부는 ‘3대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반도체·피지컬AI·AI데이터센터를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전남·광주에는 800조원을 들여 메모리 반도체 팹 4기(삼성 2기, SK하이닉스 2기)를 짓고, 충청권에는 81조원 규모의 HBM 패키징 거점을 조성한다. 경기 용인 반도체 산단은 완공 시점을 당초보다 최대 12년 앞당기기로 했다. 대통령은 이를 두고 “속도전을 넘어선 전격전”이라 표현했다.


이 숨 가쁜 전격전 뒤에는 다른 행렬이 있다. 7월30일 전남 해남을 출발한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재검토와 초고압 송전탑 건설 반대 전국행동’의 전국 대행진이다. 8월20일 서울 청와대 앞 도착을 목표로, 전남·전북·충남·충북·대전·세종·경북·강원 등 54개 지역, 3855㎞ 구간을 걷는다. 용인 산단으로 향하는 초고압 송전탑이 세워질 남쪽 마을을 잇는 저항의 걸음이다.


정작 이재명 대통령은 “전기는 생산한 지역에서 소비해야 한다”는 ‘지산지소’ 원칙을 누차 강조했다. 그런데 정책은 정반대로 움직인다. 전력 수요가 가장 큰 용인 산단은 그대로 둔 채, 전기는 먼 남쪽에서 끌어온다. 말과 실행이 따로 논다.


물도 마찬가지다. 이달 초 기준 전북 임실의 섬진강댐(옥정호) 저수율은 19%대로, 평년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그런데도 정부는 전남·광주에 하루 65만t의 물을 추가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전남 화순 동복댐 둑을 높이는 증고사업 계획(하루 25만t 추가 확보)을 내놓았다. “농민들의 물을 뺏지 않겠다”는 약속은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 앞에서 공허하게 들린다. 같은 약속이 뒤집히는 장면은 강원 홍천군 풍천리 양수발전소 현장에서도 반복됐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7월4일 현장을 찾아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할 사업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달 뒤인 5일 간담회에서는 “위법성을 확인하지 못했다”며 공사 지속 방침을 밝혔다. 8년째 싸워온 주민들 앞에서 손바닥 뒤집듯 뒤집힌 말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7월6일 청와대에서 열린 메가프로젝트 민관합동 점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첨단’ 뒤에 은폐된 현장도 서늘하다. 인공지능(AI) 반도체 HBM 속도전이 벌어진 SK하이닉스 청주 공장에서는 올해만 해도 불소가스 누출, 독성물질 TMAH 노출, 연쇄 화재 사고가 발생해 수천 명의 노동자가 긴급 대피했다. 반도체 노동자 산재 신청은 200건을 넘어서는데, 정부는 메가특구 특별법으로 주 52시간제 무력화와 규제 완화를 추진한다. 생명과 안전을 갈아 만든 번영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곳의 노동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7월13일에는 기후정의동맹을 비롯한 136개 시민사회·노동·농민 단체가 서울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3대 메가프로젝트를 “개발 폭주”로 규정했다. 사회적 논의 없이 대통령 직속 특별위원회가 인허가와 전력·용수 공급을 총괄하는 방식, 기업에는 세제·금융·인프라를 무제한 지원하면서 위험과 비용은 지역 주민·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구조를 문제 삼으며 전면 백지화를 요구한 자리였다. 이 회견은 메가프로젝트 발표 당일의 투자 규모 뉴스만큼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여당이 용인에서 기업 총수들을 만나 격려하던 그 시각, 농어촌 주민들은 국회 앞에서 “이대로는 못 살겠다”며 울부짖었다. 두 장면 사이의 아득한 거리가 지금 한국 사회의 주소다.


같은 시기 농어촌기본소득 추가 실시 지역으로 선정된 전북 무주·진안 등지에서는 인구 증가와 지역 경제 활성화 등에 대한 기대가 들려온다. 국가는 한편으로 지역 소멸을 막겠다며 농촌에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농촌 위에 초고압 송전탑 건설을 강행한다. 사람이 살아가야 할 마을 위로, 그 마을과는 무관한 산단 전력 수요를 위한 철탑을 세운다. 국가가 스스로 벌인 소멸과 개발이라는 두 정책이 농촌 공간에서 충돌하는데, 이를 하나의 그림으로 짚어내는 보도는 많지 않다.


이 모순 위에 올여름은 더 잔인한 경고를 보탰다. 두 달 가까이 극심한 가뭄으로 타들어 가던 경남 거제와 통영 등 남해안 일대에 광복절 연휴 사이 800㎜에 육박하는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와 침수, 인명 피해가 잇따랐다. 가뭄 끝에 곧바로 재난급 폭우가 덮치는 이 가혹한 ‘기후 채찍질(Climate Whiplash)’은 끝없는 에너지 소비와 성장 지상주의가 ‘부메랑’이 된 결과다. 기후재난의 최전선에서 농어촌의 삶터가 위협받는 지금, 정부는 여전히 천문학적인 전력과 물을 요구하는 첨단 메가산단 개발만을 외치고 있다. 언제까지 ‘성장’이라는 공허한 주문을 반복할 수 있을까.

박누리 농촌 기록 활동가.

사람들은 안다. 대기업의 초과이윤·주가와 달리 그 숫자를 받치기 위해 바쳐지는 지역은 언론에서 전혀 다른 무게로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20일 청와대 앞에서 대행진이 걸음을 멈출 때, 그 앞에 서야 할 얼굴들을 오래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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