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보도참사’는 ‘해 오던 대로’ 하다 일어났다. 침몰 첫날부터 언론은 목포와 안산의 장례식장, 시신이 인양돼 들어오는 팽목항을 돌며 실종자 가족과 유족의 사연을 취재했다. 언론사가 사건을 대하는 ‘공식’이었다.
사연은 구체적이고 안타까울수록 좋았다. 일주일이나 이주, 길게는 두 달 이상 머물며 교대가 이뤄질 때까지 같은 취재를 반복했다. 막내급 기자에게 ‘훈련’ 목적을 겸해 던져진 일이기도 했다.
“사연을 쓰다 보면 쓸 게 없는 때가 온단 말이에요. 사연이 비슷하기도 하고, 취재가 잘 안 되기도 하고.” 박소영 한국일보 기자가 보기에 전국 사회부 기자의 60%는 목포와 진도에 온 듯했다. 허망한 가족들을 두고 언론은 경쟁을 벌였다. “기자가 너무 많으니까 내가 안 쓴다고 해도 다른 데는 쓰고 있으니 안 쓸 수가 없어요.”
단원고 학생들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의 사망 소식을 알려주고 추도 멘트를 받으라는 지시가 아무렇지 않게 내려오던 때였다. 기자들은 화장실 안이나 배 위에서 유족, 실종자 가족의 대화를 몰래 듣고 기사로 옮겼다. 어느 기자라도 대화를 트는 데 성공하면 한시가 급한 기자들이 같이 듣자며 “피라냐 떼”처럼 몰려들었다.
매일 아침 내려오는 텅 빈 ‘지면 계획’
유족에게 뺨을 맞거나 내동댕이쳐져도 무리한 취재를 이어간 건 제작 관행의 불가항력 때문이었다. “1면부터 10면까지 세월호로 채우라고 지면 계획안이 나와 있는데 전부 텅 비어 있어요. 무조건 써야 한다고. 동료 기자는 아침에 그걸 보면 머리가 새하얘진다고 얘기하더라고요.”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초반엔 24시간 뉴스를 계속 태워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방송원고를 쓰고 이런저런 얘기를 떠들긴 했지만 ‘내가 무슨 얘기를 한 거지?’ 싶더라고요.” 제법 연차가 쌓였던 지상파 방송사 A 기자도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조각조각 최선을 다해도 전체 상황은 파악이 안 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 와중에 타사와 경쟁도 해야 했다. ‘어디 방송사는 무슨 배를 빌렸다더라, 어떤 장비를 썼다더라’ 얘기가 들렸다. “참사라고 해서 경건한 마음만으로 방송할 수는 없지만 그림을 더 잘 잡든 단독을 하든 해야 한다는 게 힘들었어요.”
언론에 주어진 그 후 10년
10년이 지났다. 세월호 참사는 이를 보도하는 기자들에게도 버겁고 압도적이었다. 실패를 거듭한 언론은 무엇을 배웠을까, 얼마나 달라졌고 무엇이 그대로일까.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8일까지 세월호 참사를 취재한 기자 8명을 인터뷰했다. 당시 수습을 갓 벗어났던 기자도 있고, 데스크가 된 팀장급 기자도 있다. 영상기자와 지역 기자 이야기도 두루 들었다.
10년 사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기본은 챙기게 된 거라고 이들은 말했다. 어느 정도 ‘선’은 지키게 됐다는 것이다. 피해자 인권과 당사자 입장을 헤아리는 분위기도 생겼다. 검증 없는 받아쓰기나 의혹 제기를 성급히 베끼는 경향도 조금은 나아졌다.
하지만 ‘기레기’라는 비난의 반작용으로 상당수 보도의 중심이 유가족에게로 쏠렸고, 참사 원인과 해법을 짚는 보도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4월만 되면 ‘잊지 않겠습니다’ 약속을 되뇌면서도 진실에 다가서기보다 그저 욕먹지 않는 데 안주하지 않았나, 이제 와 기자들은 생각한다.
그래서 여전히 ‘참사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호소가 반복되고 있고, 이태원 참사도 비슷한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닌가, 탓하게 된다. 이들이 털어놓는 지난 10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선’은 넘지 말자…기본은 생겼다”
“속보가 떠도 확인되기 전까진 쓰지 않는다.” 10년 전엔 막내였고, 이제는 사건팀장이 된 기자들은 속보 경쟁이 특히 조심스럽다. 말할 것도 없이 ‘전원구조’ 등의 오보가 남긴 교훈이다. 데스크급 기자들도 더 신중해졌다. 10년 전 사건팀장이었던 노병하 전남일보 정치부장은 “과거엔 통신기사가 뜨면 그냥 바로 가져와서 썼다면, 세월호 이후에는 사람이 다치거나 죽은 사건·사고는 한 번 더 확인해서 쓰게 된다”고 말했다.
참사 이후 한국기자협회를 중심으로 언론현업단체들이 재난보도준칙을 제정했다. 동의 없는 피해자 취재가 금지됐고 현장 데스크 운영, 불필요한 경쟁을 줄이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언론사별로 대표를 정해 취재협의체를 꾸리게 하는 지침도 포함됐다.
‘동의없는 피해자 취재 금지’ 등 변화에도… 언론사 경쟁적 취재 환경 여전
준칙의 모든 내용이 현장에서 잘 적용되지는 않더라도 의미는 있었다.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 때 무리한 피해자 취재는 줄었다고 기자들은 입을 모았다. “참사가 벌어지고 보도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어떠한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나름의 공감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경향신문 사건팀장인 조형국 기자의 말이다. 경향신문은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취재했던 기자들의 구술이 담긴 재난 보도 자료집을 만들어 수습기자 교육에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옥기원 한겨레신문 기자도 “가족들이 원하지 않으면 무리해서 취재하지 않고, 보도 당사자가 되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나름의 기준이 마련된 것 같다”고 말했다. ‘기자 정신’을 강조하며 위험한 현장으로 기자들을 떠밀던 과거와 달리 취재진의 안전과 트라우마 관리에 신경 쓰게 된 것도 10년 사이 달라진 변화다.
취재 관행 대체할 ‘무언가’ 못 찾은 언론계
하지만 아직 혼란스럽다. “~하지 말라” 위주의 규범을 대체할 만한 좋은 취재 관행과 보도 양식을 모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취재기자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얘기해주는 문화가 됐지만 정작 그게 어느 정도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경쟁적 취재 환경은 그대로다.
“외국에서는 참사 보도를 어떻게 했을까, 좀 더 효과적이고 신뢰할 만한 취재 방법이 있었을까 궁금하더라고요.” 김민재 CBS 기자는 신뢰할 만한 팩트나 취재원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취재는 없는데 뭔가를 해야 하니 오보도 많이 났던 것 같다”고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진은석 MBN 영상기자는 무리한 영상취재를 대체할 만한 방법을 고민했지만 10년째 숙제로만 남은 상태다. “간접적으로 영상을 담아내도 충분히 현장을 전달하는 게 가능한데 우리는 리포트 멘트에 영상을 ‘일대일’로 붙이는 편집을 너무 관행적으로 해요. 열 구의 시신이 올라왔다고 하면 나중에 모자이크 치는 한이 있더라도 일일이 잡아서 보여주는 식이에요.”
진 기자는 CNN에서 보도한 영상을 뒤늦게 보고 문제의식을 느꼈다. 당시 CNN은 인양된 시신을 등지고 폴리스라인을 지키고 있는 경찰의 무거운 표정과 눈물을 훔치는 얼굴을 영상에 담았다. 배경음으로 울음소리는 들리지만, 굳이 유가족의 오열하는 얼굴을 확대해 잡지는 않았다. 리포트 영상에 함께 나온 멘트는 “누구도 아이를 잃은 (부모의) 목소리에 면역되지 않았다”였다.
“취재가 끝나고 같이 고민해보자는 글을 내부 게시판에 써서 반향을 일으켰던 적은 있는데 결국에는 잘 안됐어요. 부끄럽지만 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잊고 현실에 쫓기다 보니 되돌아간 거예요.” 경쟁 구도에 ‘관행’은 너무 높은 벽이었다. “소위 말해서 위쪽에서 ‘다른 데(방송사)는 나오던데 왜 너는 안 찍었어’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언론사에 축적되지 못하는 경험
옥기원 기자는 10년 사이 세월호 관련 취재를 비교적 지속할 수 있었다. 수습 생활이 끝난 뒤 곧장 참사 현장에 투입됐고, 2017년 세월호 인양을 다시 취재했다. 2021년 세월호 내 CCTV 조작 여부 등을 조사하는 특별검사 수사도 보도할 수 있었다. “세월호는 전 사회 영역에 다 걸려 있는 문제더라고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제도적, 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보니 맡은 영역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대개 기자들은 사건 이후 재판 과정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았다. 박소영 기자는 세월호 취재 이듬해 국제부로 옮겨 갔다. “세월호 1주년 기획 취재한다고 현장에 갔던 기자들을 불러 모았어요. 다음 주 초에 기사가 나간다고 목요일인가 불러서 다음 날 진도에 다녀오라고 하는 거예요. 1박 2일 다녀와 기사를 썼죠.”
“되게 크더라고요, 배가. 생각보다.” 박 기자는 뭍으로 나온 세월호를 보러 목포에 개인적으로 다녀왔을 뿐이었다. 후배들이 무엇을 배워야 하고 어떻게 다른 보도를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
“출입처 중심 시스템으로는 장기간 지속하는 진상규명 이슈를 도무지 쫓아가면서 취재할 수 없어요. 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출입처가 없는 뉴스타파라는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김성수 기자는 뉴스타파에서 10년 동안 세월호 관련 탐사보도를 해 왔다.
김 기자는 언론이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한 과학보도, 검증보도의 영역을 지나쳤다고 지적했다. 출입처가 계속 바뀌니 새로 투입된 기자들이 가진 정보는 그만큼 적고, 조사기관의 발표와 유가족의 주장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 어려운 건 당연했다.
“어떤 조사기구가 꾸려지면 법에서 정한 활동 기간이 있잖아요, 적어도 그 기간 정도는 전담할 수 있는 한두 명을 지정하면 지금과 굉장히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시간을 들여 조선해양공학과 선박조종학 전공서적들을 직접 공부하며 취재하기도 했다. 항적조작설, 앵커침몰설, 잠수함 충돌설 가능성이 적다고 검증 보도할 수 있었던 이유다.
무력한 언론, 더 깊은 트라우마 남겼다
기자들이 트라우마를 경험한 건 단지 비극을 가까이에서 목격해서만은 아니었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 했다는 무력감 때문에 정신적 상처가 더 깊었다. 더욱이 ‘기레기’라는 모멸적 명칭까지 얻었다. 자신들이 쓰는 기사가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강박과 죄책감이 컸다. 그 반작용으로 유가족에게서 벗어나기 어려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세월호 참사의 실체는 더 알 수 없는, 요원한 것이 됐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진상규명이 안 됐다는 호소가 나온다. 매년 4월이면 들려오는 “기억하겠습니다”라는 구호는 무력한 외침이 됐다.
“유가족 목소리를 담으면 적어도 욕은 안 먹는 거잖아요. 애초에 세월호 전담 기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깊이 들여다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진상규명 등) 깊이 있는 보도를 할 수도 없고. 1주기니 5주기니 (기획을) 안 하면 욕먹을 테니까 유가족 얘기를 들으며 일종의 면피성 보도를 하는 것 같아요. 안전한 보도인 거죠.” A 기자의 말이다.
불신과 반목 10년, 언론에 주어진 역할
“사고원인에 대해 언론이 제때 정리를 해줬다면 지금은 다른 보도를 할 수 있었을 거예요.” 김성수 기자는 언론이 사회적 논의 과정에서 “제대로 결을 타 줬다면” 불필요한 불신과 반목을 키우기보다 너무 늦지 않게 사회통합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4월이 오면 달라질 수 있을까. “연안을 다니는 여객선들의 안전 상태는 어떤지, 해경은 그때처럼 500명이 탄 배가 갑자기 기울어지면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는지 보도할 수 있겠죠. 지금까지 침몰 원인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런 보도로 넘어가지 못했던 거예요.”
세월호가 잠수함과 부딪혀 침몰했다는 등의 ‘외력설’은 여러 전문가 단체가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가설을 기각했다. 그런데도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가 침몰 원인이 선체 내부에 있었다는 내인설과 별도로 외력설을 언급한 ‘두 개의 보고서’를 내놓은 데는 유가족의 뜻을 고려한 정무적 판단도 작용했다.
하지만 언론의 검증 노력이나 능력 부족, 유가족의 바람과 대치되는 내용은 전하기 꺼리는 경향이 합쳐지면서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는 것처럼 돼 버렸다. 세월호 침몰 원인은 사회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셈이다.
김민재 기자의 생각도 같다. 그는 “모두가 조심스럽게 참사를 다룬다는 생각이 든다”며 “약간은 욕먹을 걸 각오하고 밀고 가는 게 필요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6·25전쟁이나 광주민주화운동도 여전히 논란이 많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 ‘이정도는 합의된 진실이야’라고 할 만한 게 있잖아요. 세월호도 언젠가는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가 합의할 수 있는 진실로 이끌어 가는 것도 언론의 역할이니까, 이젠 과감하게 우리가 이정도는 합의할 수 있다, 이렇게 조금 더 넓혀 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