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기자, 피디, 아나운서 등 언론인 113명이 결성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가 17일 “영원한 동아투위로 남겠다”며 자유언론실천 50년 여정을 마무리했다.
동아투위는 이날 작고 위원 추모제에 이어 50주년 기념식을 열고 공식적인 활동을 마무리한다고 밝혔다. 50년 동안 매년 3월17일 동아일보사 앞에서 열었던 집회도 더 이상 열지 않고, 후배들의 자유언론실천 투쟁을 격려하는 동아투위로 남겠다고 했다.
50년 세월 사이에 동아투위 위원 113명 중 41명이 유명을 달리했고, 20~30대의 젊은 언론인들은 대부분 팔십을 넘겼다. 단 하루라도 쫓겨났던 그 자리로 돌아가 다시 펜과 마이크를 잡겠다는 꿈은 이루지 못했다.
결성 50주년 성명에서 밝힌 대로 “동아투위의 길은 민주화와 자유언론실천의 여정”이었다. 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동아일보 지면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기자들의 노력으로 시국관련 기사에 대한 ‘1단 벽’이 무너졌다.
야당과 재야의 민주화운동이 비중있게 실리고, 각계의 민주화 목소리가 공공연하게 전파를 타고 보도됐다.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반격의 칼을 빼 들었다. 하루아침에 동아일보 지면에서 광고가 사라지는 광고탄압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시민들의 격려광고가 실리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읽는 재미에 세상을 산다”, “언론의 자유 그것이 무엇이기에 나도 갖고 싶다” 등 깨알처럼 실린 격려광고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함성이 울려 퍼지는 광장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권력의 압력에 굴복했다. 1975년 3월8일 18명을 해고하는 등 일주일새 37명을 잘랐다. 기자들은 5박6일 철야농성으로 저항했지만, 동아일보는 3월17일 새벽 폭력배를 동원해 150여명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동아투위를 결성한 거리의 언론인들은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결혼반지와 아이들 돌반지를 팔아 생계를 이어갔고, 언제나 살벌한 감시 속에서 살았다. 1975년 6월 ‘청우회 사건’으로 이부영·성유보 위원이 구속됐고, 1978년 10월 학생시위, 노동운동 등 언론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를 <동아투위소식>에 실었다는 ‘민주인권일지사건’으로 안종필 2대 위원장 등 10명이 그해 11월과 이듬해 1월 구속됐다.
‘서울의 봄’이 무르익던 1980년 5월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박종만 위원 등 7명이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홍종민 위원은 잠 안재우기, 물 먹이기 등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23일 만에 체중이 10kg이나 빠진 상태에서 풀려났다.
동아투위는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결성과 월간 ‘말’ 창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조선투위, 80년해직기자 등과 뜻을 모아 1988년 5월 한겨레신문을 창간했다. 출판계로 진출한 위원들은 ‘문학과지성사’, ‘한길사’ 등을 설립해 출판문화에 새 바람을 일으켰고, 일부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동아투위는 50년 동안 명예회복과 동아일보 복직에 힘을 쏟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8년 10월 동아일보 광고탄압과 언론인 대량해고 사건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였다고 결론짓고 해직 언론인들에 대한 사과와 피해보상을 국가와 동아일보사에 각각 권고했다.
동아투위는 이를 바탕으로 2009년 3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1·2심 재판부는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해직된 것은 인정되나 이미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했지만, 대법원은 2014년 12월 김동현 위원 등 13명에 대해 시효 소멸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일부 파기 환송했다. 이듬해 12월 파기 환송심에서 13명에 대해 승소 판결이 났고, 2016년 5월 대법원은 재상고심에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금전적으로나마 위로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동아일보는 지금까지 강제해직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동아투위는 결성 50년 성명에서 동아일보의 사과를 거듭 요구하면서 “동아일보가 더욱 분발해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1960~1970년대 그때 동아의 명성을 되찾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며 동아일보를 품었다.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은 이날 오전 동아일보사 앞에서 열린 작고 위원 추모제에서 작고한 41명의 이름을 한명 한명 부르며 “우리는 자유언론의 혼을 다하여 제작했던 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5개월 동안의 ‘진정한’ 동아일보의 푸른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권영자 동아투위 초대위원장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50년간 한국언론사를 부여잡고 고생했다. 그만큼 보람 있는 삶을 살아내셨다고 자부해도 좋다”며 “이제는 후배 언론인들에게 그 짐을 넘기고자 한다. 한국의 자유언론이 건재하도록 지키는 일에 온 정성을 다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했다.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