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1978년 가을, 동아투위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제도언론이 철저히 외면하는 민주화운동 관련 소식을 ‘동아투위 소식’에 한두 건씩이라도 싣기로 했다. 비록 몇백 부 안 되는 유인물이지만, 역사의 기록을 남긴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비록 펜과 마이크는 빼앗겼지만, 우리는 변함없는 언론인이며, 언론인으로서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해 10월24일은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 동아투위는 명동에 있는 음식점 한일관에서 조촐한 기념식을 갖고 ‘동아투위 소식’을 배포했다. 평소보다 다소 두툼해진 유인물에는, 제도언론이 철저히 외면하고 묵살한 125건의 민주화운동 관련 기사가 게재돼 있었다. 음식점 주변엔 대여섯 기관에서 나온 정보 및 수사기관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기념식이 끝난 뒤 경찰은 귀가하던 홍종민 총무를 연행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0월26일 안종필 위원장, 안성열 선배, 나, 세 사람을 연행했다. 나는 유인물의 작성자였으므로 당연히 연행될 걸로 미리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동아투위는 잇달아 성명을 발표했다. “연행하고 연행하라! 존재하는 진실과 정당한 논리는 수갑으로 얽어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언론이 꽃필 때까지 싸울 것이다.”
장윤환, 김종철, 정연주 등 투위 동지들이 줄줄이 연행되었다.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지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어두운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의연한 표정들이었다. 내 집과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압수해 간 것 외에는 더 이상 무슨 증거를 찾아낼 일도 없고, 사실 관계를 놓고 ‘그렇다’‘아니다’다툴 일도 없으니 엮여 간 사람은 많아도 조사는 빨리 끝났다. 그런데도 상급기관의 지시가 떨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구속영장은 아주 늦게 떨어졌다. 첫 연행이 시작된 지 18일 만에, 연행된 10명 가운데 안종필, 안성열, 장윤환, 홍종민, 김종철, 나, 6명이 긴급조치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그리고 여섯 동지가 구속된 뒤에도 다음해 1월 초까지 정연주, 윤활식, 성유보, 이기중, 4명이 더 구속되어, 동아투위에선 모두 10명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
동아투위는 최대한 강력한 법정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이돈명, 황인철, 홍성우, 이세중, 홍남순 등 당대의 저명한 인권변호사 22명이 참여하는 막강한 변호인단을 구성해 재판에 임했다. 변호인단은 변호사 선임료를 사양했을 뿐 아니라 모든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면서 열성으로 변론했다. ‘유신 법정’의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사도 검사도 피고인도 모두 ‘양심의 법정’에선 무죄라는 걸 알고 하는 재판이니, 그건 재판이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재판받는 피고들이 오히려 더 당당하고 판사나 검사가 되레 수세적인, 그런 이상한 재판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재판도 그랬다. 열 명의 동아투위 동료들은 하나같이 당당하게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하고,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폐지를 주장했다. 나도 거침없이 내 생각을 밝혔다.
내가 구속된 이후, 아내는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KNCC 인권위원회 간사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구속되자 KNCC 측이 배려해준 것이었다. 아내는 따분한 출판사 교정 일에서 벗어나, 구속자 가족들과 연대하고 각종 인권 관련 모임에도 동참하는, 사뭇 역동적인 일을 하면서 전보다 훨씬 활기차고 씩씩해졌다. 아내는 인권탄압의 현장들을 지켜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투사가 되어 갔다. 어머니는 당시의 일을 회고록에서 이렇게 회상하셨다.
“나는 이상하게도 항상 줄에 앉은 새처럼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아들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 예감은 적중했다. 10월 하순 어느 날이었다. 무슨 일인지 2~3일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던 아들이, 웬 낯모를 사람 둘을 데리고 집에 와서, 잠시 제 방에 들어가 무언지 뒤적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나갔다. 그러고는 또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며느리에게 물어봐도 신통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는 며느리도 데모를 한다고 밤늦게 들어왔다. 참으로 마음을 잡을 수가 없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들이 결국 서대문구치소에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안절부절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남들처럼 억세고 강한 기골도 못 되는 터수에 철창생활이라니.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머릿속이 뒤숭숭하고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잡고, 하나님께 위안을 받고자 기도했다. 너무도 기막힌 일이지만, 의(義)를 위해 싸우다 받는 형벌은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정의를 외치다 죄 없이 받는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고 값진 희생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돌리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1979년 10월27일 아침, 아내는 평소보다 일찍 면회를 왔다. 아내의 얼굴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아내는 나를 보자마자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여보, 오~노! 기억하시지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엔 무언가 섬광처럼 스쳐갔다. ‘오~노~!? 그게 어딘데? 멀리야, 가까이야?’ 다그치는 내 질문에 아내는 대답했다. ‘아주 가까이요.’ 아내의 대답을 듣자 다리 힘이 쭉 빠지며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때 입회 교도관이 아내의 말을 제지했다. 그때까지도 재소자들에겐 박정희 사망 소식을 알려주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거였다. 면회를 마치고 감방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은 허공을 걷듯 걷잡을 수 없이 휘청거렸다. 나는 방문을 열자마자, 영등포교도소로 이감된 뒤 한 방에 기거하던 안성열, 장윤환, 두 선배를 향해 소리쳤다. ‘박정희가 죽었대요! 박정희가 죽었대요!’ 나는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일을 어머니는 이렇게 회고록에 남기셨다.
1979년 10월27일 새벽 다섯 시였다. 그 꼭두새벽에 난데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놀라서 수화기를 드니 이해동 목사님 사모님 목소리였다. 사모님은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라디오 뉴스를 들었느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박정희가 죽었다고 했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환호성을 지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사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26사태가 발생하고 3주도 더 지난 11월21일, 나는 영등포교도소에서 풀려나왔다. 다른 동료들도 열흘, 보름 간격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경찰서에 연행될 때부터 풀려날 때까지 13개월. 나와 내 가족에겐 짧다고 할 수 없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고생에 비하면,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기간이기도 했다.
1979년 12월8일 긴급조치9호가 해제되었지만, 그 며칠 뒤인 12월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쿠데타로 정국은 심상치 않은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화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은,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1980년 1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신군부 세력은 잠시 유화국면을 조성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제적됐던 학생들을 복학시키고, 이어서 해직교수들도 복직시켰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암울한 상황이었지만, 무언가 희미한 빛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동아투위는 잇달아 성명서를 발표하고 우리의 명예로운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자유언론 회복운동에 나선 각 신문사의 기자들도 동아‧조선투위 해직기자들의 복직을 촉구하고 나섰다. 특히 한국기자협회는 동아‧조선투위 해직기자들의 복직투쟁을 결의하고 해직기자 복직의 당위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꺼져가는 언론자유의 불씨를 안고 그들은 감옥에 끌려 들어가기도 하고 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그 불씨를 끝내 지켜왔다. 이제 그들이 간직했던 언론자유의 불씨는 한국 언론의 심장에 옮겨 놓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복직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새삼스럽게 전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고,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말을 더한다면, 한국 언론이 양심을 회복했다는 징표를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도 우리는 그들을 하루빨리 복직시킬 것을 요구한다.…”
1980년 ‘서울의 봄’은 짧았다. 5월15일의 대규모 학생시위로 절정에 이르렀던 민주화투쟁의 열기는 5월17일 새벽 0시를 기해 내려진 신군부의 비상계엄확대조치로 무참히 좌절되었다.
그 시간 동아투위 동지들은 수유리에 있는 ‘명상의 집’에서 ‘새 시대 새 언론’을 주제로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동아투위의 진로 모색을 위한 철야토론을 하다가 긴박해진 상황을 전해 들은 우리 동지들은 서둘러 토론을 중단하고 산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홍종민 동지와 함께 산길을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홍종민은 내 뒤를 이어 동아투위 총무를 맡았고, ‘민권일지’사건으로 감옥살이도 함께 한 동지이다. 그날 우리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야구 구경도 하고 부근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저녁 늦게 헤어지면서 나는 그에게 “당분간은 집에 들어가지 말자”고 강력히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그동안 “별로 한 일이 없으니 괜찮을 것”이라면서 내 권고를 뿌리치고 부득부득 자기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그는 집 앞에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그리고 구타, 물 먹이기 등 온갖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23일 만에 체중이 10kg이나 빠진 상태로 풀려났다. 그는 이때 얻은 심장병 때문에 심장박동기를 달고 살다가 결국 그 병 때문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는 그날 밤 집으로 가려는 그를 한사코 막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고 가슴 아파했다.
나는 그 날 이후 두 달가량 이리저리 숨어다녔다. 그러다가 식구들이 보고 싶기도 하고 숨어다니는 게 지겹기도 하여, 7월 중순 어느 날 ‘통금’이 임박한 늦은 시간에 집 주변을 한참 살펴보다가 재빨리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내가 집에 들어선 지 2~3분이나 지났을까? 어머니와 아내랑 막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나더니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문을 여는 순간 건장한 두 사람이 들이닥쳤다. 나는 곧 차에 태워져 어딘가로 연행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나를 태우고 내 눈을 가린 채 머리를 숙이도록 해서 도대체 어디로 끌고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20~30분쯤 걸렸을까? 그들은 나를 어느 건물로 데려갔다. 사방 벽이 빨간 어느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내 눈을 가렸던 헝겊을 풀어줬다. 그러고는 나에게 종이와 볼펜을 주며 다짜고짜 그동안의 내 행적을 쓰라고 했다. 내가 교도소에서 석방된 뒤 최근 수개월 간의 행적을 하나도 숨김없이 낱낱이 쓰라고 윽박질렀다. 그들은 밤새 나한테 똑같은 일을 두세 번 반복해 시켰다.
다음날 아침 수사관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작은 창문 너머로 밖을 내다봤다. 무슨 전철역 같은 것이 보여 자세히 보니 남영역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그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걸 알았다. 내가 집에서 연행될 때, 잠깐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더니 총을 꺼내 들던 그 우악스럽게 생긴 수사관은 고문으로 악명을 날린 이근안이라는 자였다.
내가 남영동에 끌려간 주된 이유는 ‘서울의 봄’이 절정에 달했던 5월15일에 발표된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 서명한 것 때문이었다. 이 성명서는 학계, 종교계, 법조계, 문단, 언론계의 민주화를 갈망하는 인사들 134명이 서명한 것이었는데, 동아투위에선 나를 포함해 7명이 동참했다. 이 시국선언에 서명한 사람들 가운데 여러 명이 계엄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한두 변호사는 한동안 변호사 일을 못하게 되고, 일부 교수들은 강제해직의 시련을 겪기도 했다.
내가 남영동에 끌려갔을 때는 5‧17비상계엄 확대조치와 5‧18광주민주화운동 직후의 살벌했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들어서 그랬는지 혹독한 고문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사관들은, 벽 색깔이 다른 이 방 저 방으로 나를 끌고 다니며 금방이라도 고문할 듯한 자세로 온갖 협박을 다했다.
밤낮으로 비슷비슷한 질문을 되풀이하고, 똑같은 자술서를 반복해서 쓰게 했다. 나는 8일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나는 수사기관에 끌려간 다른 어느 때보다도 심한 굴욕감과 참담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들은 나를 풀어주기 전에 각서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 게 일종의 반성문을 뜻하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 같은 데서도 몇 차례 각서를 썼지만, 그때는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밖에 나가서 말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요식절차 같은 것이어서 큰 부담감이 없었다.
그러나 남영동에선, 내 영혼을 파는 것 같은 모멸감을 느끼며 나는 그들이 요구하는 각서를 써줬다. 나는 어쩌면, 내가 잡혀간 곳이 남영동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고문에 대한 공포 때문에 내 중심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대공분실 정문을 나서서 남영역까지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단단하다고 자부하던 내 의지의 허약함을 깨닫는 순간 내 삶 전체가 허물어지는 것 같은 허탈감을 느꼈다.
그 한 해가 끝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동아투위 사무실마저 폐쇄되어 마땅히 갈만한 곳도 없고, 신군부의 살인적인 폭압에 모두가 움츠러들어 있어서 함께 울분을 토로할 동료들을 만나 어울리기도 어려웠다. 나는 그 불의의 시대에 침묵하는 하느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역사는 뒷걸음질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하느님의 섭리 가운데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나의 믿음과 소망은 회의의 구름으로 뒤덮여 갔다.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강한 자를 바르게 하시는 하느님,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어디서나 정의를 살리시고 해방을 주시는 그런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확고한 것 같던 내 믿음은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게 포장되어 있었지 진짜 속 알맹이는 그렇게 허약했다. 나는 그렇게 때론 절망하고 때론 누군가를 원망했다.
먹고 사는 문제도 점점 더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아내가 살림을 겨우겨우 꾸려나갔지만,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에 집 한 칸 변변히 없고, 장래에 대한 전망도 절벽처럼 느껴졌다. 그때까지도 나는 감시 대상인 데다 나이도 어중간해서 좀처럼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내 딱한 사정을 눈치챈 신문사 동기생 이종욱이 자신이 편집 책임자로 있던 출판사에 자리를 마련해 줬다. 1981년 1월부터 나는 출판사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6년 만에 정시 출퇴근하는 샐러리맨으로 돌아가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뭔가 좀 어색하기도 하고, 공연히 남의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준비위원회 후원
NH농협 301-0240-3680-71
재단법인 자유언론실천재단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