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1974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기점으로 동아일보는 기관원의 출입을 금지하면서 신문과 방송에서 금단의 벽이 무너지고 언론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권력을 감시 비판하는 언론을 용인할 수 없었던 박정희 군부 유신독재정권은 12월 들어 광고탄압을 통해 동아일보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문과 방송, 잡지에 갑자기 광고가 사라진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1975년 1월4일 뚝섬 근방에 있는 한일약품을 직접 찾아갔다. 한일약품 선전부 광고담당 간부는 “회사의 정책결정에 따라 동아일보사에 당분간 광고를 집행하지 마라”는 지시를 받았다고만 설명했다. 일류매체인 동아일보의 광고효과를 잘 알면서도 경영원칙에 어긋나는 홍보마케팅정책을 하는 이유를 따져 묻자 “답답하고 괴롭다”면서 속마음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후 내가 한국광고총연합회 상근부회장과 광고산업발전위원장을 맡으면서 여러 광고주로부터 “당시 동아에 광고 중단을 압력통보한 곳은 중앙정보부와 국세청이었다”는 고백을 들었다.
정보부와 국세청이 백지광고 주도
1975년 새해 들어 백지광고에 대한 국민 성원이 들불처럼 일기는 했지만, 회사 측은 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자유언론에 앞장선 기자들을 경영악화와 기구축소라는 구실로 해직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기자들은 1975년 3월12일부터 제작거부에 들어갔는데 농성 5일째인 16일 외부 인력을 동원하여 농성자들을 강제로 몰아낼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회사 내에 파다했다. 이에 대비하여 우리는 야간 불침당번을 정했는데 나는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3층 편집국 담당 지킴이였다. 마침내 3월17일 새벽 3시, 건너편 출판국 쪽과 주차장 주변에서 불빛신호가 보이고 어둠 속에 왕래하는 사람들의 형체가 어른거렸다. 나는 우선 며칠째 농성으로 지쳐서 이리저리 책상이나 의자에 엎드려 있는 동료들을 깨웠다. 당시 편집국 안에는 83명의 농성 기자와 시노트 신부가 있었다.
정확하게 3시15분, 마침내 회사 측이 동원한 200여 명의 폭도들이 강렬한 서치라이트를 앞세우고 “와, 와”하는 함성과 함께 단식팀이 농성하고 있는 2층 공무국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다. 문과 벽을 부수는 해머소리가 ‘쿵, 쿵’ 울려왔다. 마치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인디언들의 기습장면 같은 것이었다. 그 해머소리는 가슴을 치는 아픔으로 느껴졌다.
3시20분쯤 폭도들은 산소용접기와 해머로 철문을 부수고 23명의 기자들이 5일째 단식농성 중인 조판공장으로 쳐들어갔다. 2층 공무국이 함락되고 농성기자들을 실은 지프차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3시50분쯤, 폭도들은 3층 편집국 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폭도들은 산소용접기와 해머, 각목으로 구름다리 쪽의 철제 덧문과 창문을 부수고 편집국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일촉즉발의 흥분과 긴장이 서렸다. 접근하는 기자들에게는 소화기 가스를 내뿜기도 했다. 낯선 젊은이들 사이사이에 판매부 직원과 경비원들이 섞여 있었다.
이때 안종필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이 “우리는 끝까지 비폭력으로 투쟁해야 한다”면서 냉정을 호소했다. 중과부적이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기자들이 폭력으로 맞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편집국 한가운데 뭉쳐서 스크럼을 짜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폭력배들은 기자들에게 “당장 나가라”면서 위협을 가해왔지만, 농성기자들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일을 하고 나갈 테니 자리를 좀 비켜 달라”며 이들을 설득했다.
한참 실랑이 끝에 사원이 아닌 사람들을 일단 바깥으로 나가게 한 뒤 그동안 우리가 주장해온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낭독하고, 인권운동 노래로 유명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불렀다. 이어서 ‘자유언론 만세’ ‘민주회복 만세’ ‘동아일보 만세’등 만세삼창을 외쳤다. 마지막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자못 비장한 심정으로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때 편집국 사회부 기둥에 걸었던 휘호 ‘自由言論實踐宣言’의 커다란 족자를 걷어 내렸다. 그렇게 해서 동아일보사 안에서의 자유언론운동은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회사 첫 출근 날 찾아온 기관원
우리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들은 일터에서 쫓겨난 후 6개월 동안 매일 아침 동아일보 앞에서 침묵시위를 하고 우리의 주장을 담은 유인물을 만들어 각계 요로에 전달하며 정말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노모를 모시고 있었던 나는 어머님이 걱정하실까 봐 평소대로 출근시간을 지켰고 처음 몇 달 동안은 교회를 비롯한 민주단체들의 격려금으로 그나마 연명해 갔다.
침묵시위 6개월 후 생업을 위해 각자가 뿔뿔이 헤어졌을 때 나는 동아일보 이사였다가 해촉된 홍승면 선배 추천으로 쌍용그룹 창업자인 김성곤씨의 전기를 집필하는 임시직 사원으로 일했다. 3년 가까운 전기 작업이 일단락되자 회사 측은 기업의 사보제작을 나에게 맡기면서 정식 사원으로 발령했다. 그런데 1977년 3월 초 정식 사원이 되어 사무실에 첫 출근하던 날,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이봉노였다. 그는 언론통제를 위해 동아일보사에 출입하던 기관원이었으며, 유신헌법 반대 서명운동과 관련하여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나를 직접 조사했던 장본인이었다. 나에 관한 동정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므로 확인 차 찾아왔다고 했지만, 당시 내가 느꼈던 불쾌감과 좌절감과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지 오웰이 말한 통제사회의 ‘빅 브라더’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그는 내가 소속된 종합기획실의 실장실에도 들렀다가 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면 관할 경찰서 정보과 직원이 제일 먼저 찾아오는 방문자였다. 심지어 그 이봉노는 나의 결혼식장에도 나타났다. 나는 그를 조용히 불러 “오늘은 내 생애의 소중한 축일이니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진정으로 축하차 왔다”고 했지만 어떤 사람들이 하객으로 왔는지 염탐하러 온 것임을 모를 리 없었다. 직업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마저 감시당하던 시대였다.
그런 후에도 이봉노는 매년 한두 번씩 사무실을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조그만 선물을 갖고 와서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 그는 김포공항 보안책임자로 나가 있다면서 공항에 관련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달라고 했다. 인사치레로 알고 지나쳤는데 얼마 후 세계잼버리대회 유치를 위한 영상홍보물 제작을 맡아 편집기술이 뛰어난 일본에 필름을 갖고 왕래해야 할 일이 생겼다. 우리나라 각지의 항공촬영이 많이 담긴 필름이라 통관하는데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이봉노에게 부탁했더니 자신의 업무처럼 모든 것을 정말 잘 보살펴주었다. 그의 도움 덕택으로 독일 뮌헨에서 잼버리유치에 성공했고 1991년 고성잼버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나는 보이스카웃 훈장을 받았다. 그 일뿐만 아니라 비행기 탑승과 관련된 몇 가지 고마움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세상사 인연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직장생활 초기 나의 언론사 해직경력은 많은 걸림돌이 되었다. 당시는 중동붐을 타고 기업의 해외진출이 활발했던 터라 건설 현장의 홍보자료를 만들기 위해 해외 출장을 갈 일이 가끔 있었다. 그런데 여권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해외 출장 시 여권발급은 중앙정보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가정사를 핑계로 출장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했지만 결국 나의 과거 경력이 드러나 회사 내에서도 문제 사원, 결격 사원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게다가 지명수배를 당한 몇몇 동지들의 정보를 얻기 위해 매일 출근하다시피 사무실을 찾아오는 형사도 있어서 곤혹스러웠다. 특히 나는 전공이 외국어여서 해외근무 기회가 있었는데도 공권력에 의해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복직협상 때 “이부영 등 4명은 안 된다”
1988년 노태우가 직선제로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군부의 연장이었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민주화시대가 열리기 시작하자 우리의 복직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1993년 당시 성유보 선배가 동아투위 위원장이고 내가 총무를 맡았는데 동아일보와 이 문제로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되었다. 동아일보와 동아투위 수뇌부인 김병관 사장과 성유보 위원장의 직접 협상이 원칙이지만 동아일보 요청으로 편의상 이현락 주필과 내가 마포 가든호텔에서 만남을 가졌다.
쟁점은 우리를 폭도로 매도하면서 강제 해직시킨 데에 대한 공개사과와 해직시기 동안의 배상, 그리고 복직문제 등 세 가지였다. 첫 번째 공개사과는 시대적 상황을 설명하고 ‘유감’ 표명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두 번째 배상문제는 20년간 해직에 따른 물질적 정신적 피해액을 5000만원씩으로 하고 이와는 별도로 언론자유 운동으로 희생당한 언론인을 구제하기 위한 자유언론기금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동아투위 위원 113명이 56억5000만원에 언론기금 20여억원이면 모두 80억원이며 기금은 회사 여건에 따라 추후 적립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현락 주필은 회사가 그런 거액을 감당할 수 없으며, 단지 김병관 사장이 사재 10억원을 배상기금으로 내놓겠다고 했다.
또한 복직문제도 난관에 부닥쳤다. 연로한 선배들은 명예회복 차원에서 일단 복직했다가 사직하는 형식을 취할 것이므로 실제로 현업에 돌아갈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회사 측은 이부영, 성유보, 박지동, 심재택 같은 사람이 기자로 복직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이었다. 회사 측 입장이라기보다 정부 측 가이드라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두 당사자는 이를 양해하는 입장이었지만 함께 투쟁해온 동아투위 정신과는 배치되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양측은 더 이상 의견 접근이 되지 않아 이현락 주필과 협상은 세 번 만에 단절되고 말았다. 나는 1969년 말 동아일보에 입사한 후 1974년 2월 동아일보 노조 설립 과정에서 해직되었다가 한 달 만에 재입사했는데, 자유언론 사태로 1975년 9월 다시 해직된 후 세 번째 입사의 기회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1987년 6·29선언 이후 한겨레신문 창간준비를 위해 권근술, 정태기 선배 등과 여러 차례 회동을 가졌다. 나는 10여 년 동안 기업에 종사해온 입장이라 이들이 추구하는 새 신문에 스포츠와 증권시장의 주가시세를 없애자는 등 현실과 거리가 먼 너무 이상적인 편집방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현실감각을 바탕으로 한 나의 조언이 참고가 되었는지 실제로 신문이 창간되었을 때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듬해 3월 중앙대학교 교정에서 치러진 한겨레 신입사원 채용시험장에서 우리 부부는 감독관으로 봉사했다. 나는 주주로 한겨레에 동참했고 주변에도 열심히 권유했지만 막상 제작진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성유보 한겨레 초대 편집위원장은 김두식 선배 밑에서 사회부에 근무하라고 나에게 강력히 요청했지만 외부에서 한겨레를 돕겠다고 사양했다.
그 후 한겨레가 정부의 비판 정론지로 두각을 나타내자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또 다시 그 음흉한 광고탄압의 칼을 빼들었다. 나는 회사의 홍보간부로서 광고집행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김석원 회장이 안기부 요청이라면서 한겨레에 광고 자제를 지시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 맞추어 대부분 기업이 한겨레를 차별하는 데 비해 나는 광고집행과 구독에서 가능한 우호적인 입장을 취해왔기에 지적당할만한 사항이었다. 나는 안기부의 이런 부당한 압력을 당시 한겨레 권근술 사장에게 은밀하게 귀띔해 주었다. 물론 한겨레는 이때부터 안기부의 부당 압력을 대서특필하면서 정부와 긴장관계가 더욱 극심해졌다.
나는 동아일보 노조 사태로 해직되었다가 복직된 경험이 있어 10·24자유언론실천투쟁 때도 멀지 않아 다시 복직할 것이라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동아일보에서 해직은 단순히 언론인으로서의 꿈이 사라진 것에 대한 정신적 공백뿐만 아니라, 그 뒤 나의 삶 구석구석을 왜곡 굴절시킨 것이다. 그래서 동아 사태는 50년 전 단순히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그 뒤 나의 삶을 계속 짓눌려온 커다란 트라우마였다.
오늘날 언론인은 조선시대 사간원의 언관에 해당한다. 1975년(을묘) 동아의 대규모 해직은 조선시대에 비유하면 선비들의 수난이므로 동아사태는 을묘사화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가장 큰 필화사건인 무오사화 때 김종직은 부관참시까지 당했지만 15년 만에 복권되었는데 우리 동아투위 위원들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명예회복이나 정당한 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동안 우리 동아투위 위원 개개인의 삶은 희생되었지만 우리나라 민주화와 언론자유가 확장돼 그런대로 위안을 받고 지내왔는데, 최근 들어 민주주의와 언론이 과거 유신시대로 후퇴하고 있는 것 같아 분노와 허탈감을 감출 수가 없다.
진실의 기차는 항상 연착한다고 하지만 동아투위 열차는 너무나 연착하고 있다. “늦게 온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도 있다. 동아투위 113명 동지 중 이미 40명이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명예회복과 민주정의사회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제 평균 80세가 넘은 동아투위 위원들은 우리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바랄 뿐이다. 역사에 완전범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라도 먼저 간 선배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싶다.
“해직 언론인들의 투쟁과 오랜 실직으로 인한 신산한 삶을 옆에서 지켜본 나는 안타까웠다.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만든 동아투위와 같은 저항이 없었다면 우리 언론은 얼마나 부끄러울까. 일제에 항거한 3·1독립만세운동으로 부끄럽지 않은 민족이 되었듯이 불의에 대한 공분과 저항은 실존과 자존의 증거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이다.”(이희호의 자서전 ‘동행’에서)
김동현 동아투위 부위원장의 전체기사 보기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