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MBC에 좌표 찍는 대통령과 여당]
특정 매체 단독 아닌 풀기자단 영상
대통령 비속어, 대부분 보도했는데
MBC에 "발음 특정 근거" 운운하며
대통령실, 보도 설명요구 공문 보내
여당은 "국익훼손·왜곡보도"라더니
민주당·MBC 묶어 "정언유착" 주장
허위방송이라며 사장 사퇴 요구도
‘방귀 뀐 놈이 성 낸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일부 단어의 진위 여부를 떠나 국제 외교무대에서 ‘이 XX들이’라고 비속어를 쓴 윤석열 대통령이 사과는커녕 비난의 화살을 언론, 특히 MBC로 돌리고 있다. 비속어 보도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시작으로 발언 내용이 틀리다며 왜곡 보도로 몰아가고, 그것도 모자라 ‘정언유착’ 의혹까지 제기하는 등 전 방위적인 MBC 탄압에 나서는 모양새다. 대통령 비서실은 26일 저녁엔 MBC에 ‘해석하기 어려운 발음을 어떤 근거로 특정했는지’ 등 보도와 관련한 설명을 요구하는 공문까지 보냈다. 여당인 국민의힘도 법적 조치를 공언한 데 이어 27일 ‘MBC 편파조작방송 진상규명 TF’를 구성하며 다방면으로 MBC를 손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윤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됐다. 지난 22일(한국시각) 오전 6시경 윤 대통령은 미국 순방 중 글로벌 펀드 재정공약 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만남 이후 행사장을 빠져나가며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X팔려서 어떡하나’라는 듯한 발언을 했고, 이 장면이 풀(Pool) 기자단의 카메라에 잡혔다. 이 영상은 아침 7시30분쯤 각 방송사의 서버로 송출됐고, 영상을 돌려보다 비속어에 깜짝 놀란 방송기자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가던 중 신문기자들과 순방기자단에도 영상이 공유되며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윤 대통령의 순방 일정에 동행했던 이정은 MBC 기자는 26일 ‘뉴스데스크’에서 “MBC만 취재한 내용이 아니라 순방기자단에 거의 동시적으로 비속어 영상이 공유되고 취재도 이뤄진 것”이라며 “당시 기자단 사이에선 해당 발언이 어떻게 들리는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견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보다는 이 발언을 어떤 맥락에서 해석해야 하는지가 기자단 사이에서 화두였고 대통령실에 설명도 요청했는데, 대외협력비서관실 관계자는 설명을 하는 대신 영상취재 기자단에 ‘어떻게 해줄 수 없느냐’고 말하고 방송사 취재기자단 간사에게도 ‘공식석상이 아니었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 외교상 부담이 될 수 있는 내용’이라고 간곡한 요청을 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에서 발언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기자단은 사안의 엄중함을 고려해 비보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22일 오전 9시39분 엠바고 해제 이후부터 순차적으로 관련 내용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MBC가 오전 10시7분 유튜브에 해당 동영상을 게재하며 최초 보도를 했고 이후 KBS, SBS 등 지상파를 비롯해 종합편성채널, 보도전문채널 등 방송사와 주요 신문사 등 150여곳에 달하는 언론사에서 ‘바이든’을 명시해 기사를 썼다. 그러나 15시간 만인 오후 11시쯤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이 ‘바이든’이 아닌 ‘날리면’이라 설명하고 “짜깁기와 왜곡”, “국익 자해 행위”를 언급하면서 발언 내용에 대한 논란이 시작됐다.
다음날인 23일부터 정치권에선 ‘국익 훼손’과 ‘왜곡 보도’를 두 축으로 언론사를 비판하는 발언이 쏟아졌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을 제외하면 오전 국민의힘 원내대책회의 때까지만 해도 “공영방송사들이 사소한 트집으로 흑색선전 펼치기”를 하고 있다며 발언 내용 자체를 부정하지도, MBC를 특정하지도 않는 두루뭉술한 비판이 나왔지만, 이후부턴 MBC를 겨냥해 ‘조작 보도’를 했다는 공격이 시작됐다. 2008년 ‘광우병 조작 보도’ 사태를 상기시킨다거나 “신속한 보도가 아니라 신속한 조작”이라는 등 MBC에 비판의 화살을 꽂는 발언이 쏟아졌다. MBC가 “최대한 절제해 영상을 올렸고, 어떠한 해석이나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발언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고 밝혔지만 소용없었다.
25일엔 MBC 소수 노조인 MBC노동조합(제3노조)에서 ‘정언유착’ 의혹을 제기했다. MBC 보도보다 앞서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등이 ‘막말’ 비판을 했는데, MBC 쪽에서 누군가 보도 전 관련 내용을 전달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MBC가 단독으로 취재한 사안도 아닐뿐더러 최초 보도 이전 대통령실 뿐만 아니라 대다수 언론, 심지어 SNS에까지 퍼졌던 내용이었지만 ‘정언유착’ 의혹은 정치권엔 좋은 재료감이 됐다. 26일부턴 이를 토대로 MBC에 항의방문을 하고, 상응하는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하며 박성제 MBC 사장이 허위 방송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를 해야 한다는 요구가 국민의힘에서 빗발치기 시작했다.
때마침 비속어 발언의 당사자인 윤 대통령까지 기자들과의 출근길 문답에서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 “이 부분에 대한 진상이 더 확실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책임을 회피하면서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 논란은 어느새 MBC의 왜곡 보도로 프레임이 바뀌게 됐다. 야당을 지목한 것인지 아닌지 대통령실 안에서도 말이 엇갈리지만 적어도 우리 국회를 향해 “이 XX들”이라 지칭한 대통령은 사과 한 마디 없이 왜곡 보도의 희생자가 되고, 최초 보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MBC는 민주당과 내통해 조작 보도를 한 언론사가 됐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의 공세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비서실은 26일 저녁 MBC 사장실에 비속어 발언 보도와 관련해 설명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국익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며 비속어 발언 보도의 사실 확인을 위해 MBC가 거친 절차는 무엇이었는지 등 6개 항목에 걸쳐 조목조목 상세한 답변을 요구하는 공문이었다. 이에 앞서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도 MBC 사장, 부사장, 보도본부장 중 한 명이 국회에 와 국민의힘 의원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허위 방송에 대해 해명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국민의힘은 또 당내에 ‘MBC 편파조작방송 진상규명 TF’를 구성하며 28일 오전, MBC에 집단 항의방문을 예고했다.
전 방위적인 정치권의 공세에 MBC 기자협회를 비롯해 현업 언론단체와 민주당 의원들은 정치권의 압박을 한 목소리로 비판하며 윤 대통령이 사과부터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기자협회 등 6개 현업 언론단체는 27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각사의 판단에 따라 같은 자막을 방송한 여타 지상파 방송사와 종편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 제기도 못하면서 특정 방송사만 반복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대통령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촉발된 실책과 치부를 언론 탓으로 돌려 언론탄압과 방송장악의 불쏘시개로 삼아보려는 얕은 계산”이라며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국민에게 사과부터 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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