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견디다 무너져 내린 마음… 기자도 심리치료가 필요합니다
[언론사들, 지원 프로그램 속속 도입]
기자 43% "일하며 감정 메말라가"
SBS·한겨레·한국 자체적으로 운영
심리 상담 받은 기자들 만족 높아
#방송사 A 기자는 지난해 ‘조국 사태’ 당시 관련 보도를 했다가 수차례 인신공격을 받았다. 기사에 대한 비판을 넘어 그의 외모를 평가하거나 누가 봐도 성희롱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이 댓글로 달리는 등 곤욕을 치렀다. A 기자는 “평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스타일이 아닌데도 조국 일가 수사가 진행되는 두세 달 간은 일상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의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며 “내가 이 정도까지 욕을 먹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특히 인터넷 공간에 그런 내용이 계속 남아, 앞으로 저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거라는 것이 큰 스트레스 요인”이라고 말했다.
#종합일간지 B 기자도 최근 본인 사진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하고 다니고 있다. 정치부 기자라 총선 국면에 여러 기사를 쓸 텐데 그의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은 일부 누리꾼이 그의 얼굴과 출신학교 등 신상을 노출할까 우려돼서다. B 기자는 “주로 편이 갈리는 정치 관련 기사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다”며 “몇 년 전 기고글에 실렸던 제 사진까지 내려달라 요청 중이다. 사전에 조심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최근 사회가 복잡다단해지면서 기자들이 겪는 스트레스 장애와 트라우마의 양상도 복잡해지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이 발달하며 독자들이 보도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데다 적대적이거나 위협적인 행동이 증가하며 기자들이 심리적 압박을 느끼는 사례가 많아져서다. 게다가 일반인들이 접하지 못하는 정보와 환경에 쉽게 노출되는 직무 특성상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확률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펴낸 ‘2019 한국의 언론인’에 따르면 기자들은 직무 수행 시 정서적 소진을 느끼고 있었다. ‘업무로 인하여 나는 정서적으로 메말라감을 느낀다’는 문항에 43.5%가, ‘나는 업무로 인해 완전히 탈진되었다고 느낀다’는 문항에는 39.4%가 ‘그렇다’고 답했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기자들은 정서적 소진 정도가 아니라 심한 경우 ‘PTSD’로 불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까지 겪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2014~2015년 세월호 참사 취재기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자료가 유일한데, 자료에 따르면 세월호 한 달 이후인 1차 조사 때는 270명 중 45.9%(124명)에서 PTSD 증상이 발견됐고, 2차 후속조사 때는 응답자 63명 중 약 25%가 6개월 이상 PTSD 증상을 겪고 있었다.
그동안 기자 사회에선 상담이나 치료에 소극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기자는 강해야 한다고 믿는 ‘마초적 직업관’이나 취재 대상과 자신을 감정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고 믿는 ‘객관주의적 직업관’이 영향을 미쳤다. 상담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높았다. 그러나 최근 일부 언론사에선 기자들의 스트레스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심리 치료 프로그램을 도입하거나 운영 중에 있다.
한국일보는 이달부터 ‘취재 트라우마 심리 지원 제도’를 마련해 구성원들의 스트레스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 관련 보고체계를 거친 후 기자가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 직접 내원해 상담과 치료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진료비와 치료비는 일체 회사가 부담한다. 한국일보 관계자는 “처음엔 의료기관과 직접 계약을 맺고 사내에 의료진 또는 심리상담사가 찾아오는 형태도 검토했으나 개인 프라이버시에 대한 우려 등 다양한 의견이 있어 이 같은 방식으로 결정했다”며 “제도 시행 초기라 아직 신청자는 없으나 구성원들의 관심은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속적인 업무환경 개선과 구성원 만족도 향상을 위해 상시 운영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SBS도 6년여 전부터 임직원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업무뿐만 아니라 직장 내, 가족 간 관계 갈등으로 인해 스트레스 관리가 필요한 기자들이 무료로 개인상담과 정밀심리검사 등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극동상담심리연구원, 한겨레심리상담센터 두 군데서 상담이 진행되며, 의사소통이나 공동체 의식함양을 위해 8~15명이 참여하는 집단 상담도 받을 수 있다. SBS 관계자는 “세월호 참사 때 힘들어한 기자들이 프로그램을 많이 이용했다”며 “사내 성폭력 문제로 고통을 겪은 분들도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게 안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신문도 2017년 9월부터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전문 상담사가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관리해줌으로써 보다 건강한 조직문화를 만들고 업무 성과를 향상하기 위해 도입됐다. 공식적으론 매달 선착순 5명에 한해 5회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했지만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인원 제한이나 상담 횟수는 유동적이다. 한겨레 관계자는 “지난해의 경우 10여명 정도가 상담을 받았다”며 “회사 안팎으로 어려운 취재를 한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심리 상담을 권하고 있다”고 했다.
상담을 받은 기자들은 만족감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연말 심리 상담을 받은 한겨레 한 기자는 “같은 팀 동료와 관계가 악화돼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는데, 이대로 앓고 있어선 안 되겠다 싶은 생각에 상담을 받았다”며 “혼자 고민할 땐 어떡하나 싶은 것들이 상담을 받으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됐다. 신문사라는 조직이 워낙 일이 많고 알게 모르게 다들 스트레스가 많을 텐데 누굴 뒤에서 헐뜯기보다 건전한 방향으로 풀어지니 건강한 조직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심리 상담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이를 바람직한 현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배정근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요즘 같이 댓글을 통한 공격이 심한 때에는 기자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 있는데 언론사가 그런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조치를 취하는 건 아주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혹여 회사 차원에서 심리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없다면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문화라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심리적 외상에 제일 좋은 처방이 디브리핑(Debriefing)인데, 자기가 겪은 일을 동료나 상사에게 얘기하기만 해도 상당 부분 스트레스가 해소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실제 호주 방송사 ABC는 트라우마와 관련한 동료 지지(Peer Support)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보도국 내 추천과 선발 과정을 통해 뽑힌 피어 서포터가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은 후, 큰 사건·사고마다 취재기자 등이 한 업무에 얼마나 오래 배치되고 있는지 모니터하고, 필요하면 전문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ABC에선 200명 직원 중 70명이 피어 서포터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ABC를 방문해 이 프로그램을 참관한 이정애 SBS SDF팀장은 “지금은 잘 운영되고 있지만 ABC에서도 문화로 정착되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하더라. 프로그램은 필요하지만 외국 프로그램을 그냥 도입하기보다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끔 만드는 것이 낫다고 본다”며 “개별 언론사가 하는 것이 맞는 건지, 언론재단같이 언론 관련 기관에서 센터를 두는 것이 맞는 건지 논의가 됐으면 한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아직 언론인들이 어느 정도나 심리적 외상에 노출돼 있는지 전체적인 실태 파악도 안 돼 있는데 그런 연구부터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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