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화된 '피의사실 공표죄' 부활하나… 기자들, 사실확인 어떻게

울산지검,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경찰관 2명 수사
지역 기관들 브리핑 줄이고 자료 공개 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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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사문화돼 있었던 피의사실 공표죄가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22일 대검찰청 산하 검찰수사심의위원회는 울산지검이 수사 중인 ‘경찰관 피의사실 공표 사건’에 ‘계속 수사’ 결정을 내렸다. 수사 결과를 담은 보도자료를 언론에 배포한 경찰의 행위가 피의사실 공표라며, 계속 수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검경의 수사 관행, 언론의 보도 관행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이 같은 결정에 논란은 뜨거워졌고, 세간의 이목은 울산지검으로 쏠리게 됐다. 만약 울산지검이 이 사건을 재판에 넘긴다면 피의사실 공표죄를 적용해 기소하는 첫 사례가 될 전망이다.


이 사건의 시작은 지난 1월22일이었다. 울산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이날 약사법 위반과 관련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해 8월경부터 11월경까지 미리 위조한 약사면허증으로 약사 행세를 하며 부산·울산·경남 일대 약국에 취업해 의약품을 조제 및 판매한 무자격자 A씨를 약사법 위반과 공문서 위조 및 행사 혐의로 검거·구속하고, 기소 의견으로 사건 송치했다는 내용이었다. 보도자료엔 범죄자의 범죄 행위와 이에 대한 엄정 대처 방침이 담겼고, A씨의 신상 정보가 지워진 위조 약사면허증 사진도 함께 배포됐다. 울산 지역 기자들에 따르면 이전의 보도자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울산지검은 그러나 이 보도자료가 무죄추정 원칙을 위반해 기소 전에 피의사실을 공표했다며 울산경찰청 광역수사대장과 팀장 등 2명을 입건해 수사를 진행했다.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들을 상대로 취재 경위와 배포될 당시의 자료 등을 확인하기도 했다. ‘터질 것이 터졌다’는 게 당시 반응이었다. 울산지검이 지난해 12월부터 울산경찰청과 경남지방경찰청 등에 ‘피의사실 공표 관련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내며 피의사실 공표죄 적용을 예고해서다.


당시 울산지검의 이례적인 행동에 여러 분석이 난무했다. 2017년 울산지검 검사가 연루된 일명 ‘고래고기 환부사건’에 대한 보복성 수사라는 시각부터 울산시 선거관리위원회의 보도자료로 수사에 어려움을 겪은 검찰이 칼을 든 것이라는 다양한 이유들이 제기됐다. 최근 퇴임한 송인택 전 울산지검장 때문이라는 분석도 많았다. 송 지검장이 부임 후 ‘피의사실 공표’에 엄격한 태도를 보여 왔던 데다 지난해 하반기부턴 송 지검장과 차장검사 등이 ‘피의사실 공표죄 연구 모임’을 결성해 연구를 진행했고, 최근엔 그 연구 결과물을 책자로 내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울산지검이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한 경찰의 행위를 피의사실 공표죄로 수사하면서 검경의 수사 관행, 언론의 보도 관행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지난 3월13일 과천 정부과천청사에서 2019년 법부무 주요 업무계획을 발표하며 피의사실 공표 등 인권보호 정책 강화를 강조하는 모습. /연합뉴스

▲울산지검이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한 경찰의 행위를 피의사실 공표죄로 수사하면서 검경의 수사 관행, 언론의 보도 관행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지난 3월13일 과천 정부과천청사에서 2019년 법부무 주요 업무계획을 발표하며 피의사실 공표 등 인권보호 정책 강화를 강조하는 모습. /연합뉴스

◇사실관계도 확인해주지 않는 지역 수사기관  
피의사실 공표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분위기가 감지되자 언론 역시 타격을 받았다. 일부 지역에선 먼저 나서 수사 자료를 공개했던 검·경이 최근 들어 브리핑 횟수를 줄이거나 사건·사고 자료를 비공개하려 해 기자들이 사건기사 작성에 애를 먹고 있다. 특히 경찰관 2명이 수사를 받고 있는 울산 지역은 완전히 폐쇄적인 분위기로 변했다.


주성미 울산매일신문 기자는 “기자브리핑을 준비하던 해양경찰서는 브리핑을 돌연 취소했고, 소방당국 역시 기자들이 화재 발생 위치를 물어봐도 주소를 전혀 알려주지 않고 있다”며 “기자들이 외부에서 압수수색이나 사건·사고 정보를 듣고 경찰에 최종적으로 확인하려 해도 ‘피의자 정보라 안 된다’며 거절하는 상황이다. 수사기관이 아닌 곳들은 수사 절차를 완벽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최종적인 사실관계 정도는 확인해줬으면 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해주려 한다”고 말했다.


다른 지역 수사기관 역시 울산 사례를 언급하며 소극적 대응을 하고 있다. 대구 지역의 한 기자는 “아침마다 지방청에서 배포하는 검거 자료가 요즘에는 전무하다”며 “일부 사건·사고는 지방청에서 간단하게 문자를 주고 관련 내용을 문의할 수 있는 연락처를 가르쳐주긴 하는데 지방청에선 일선 서에 물어봐라, 일선 서는 지방청 지침이 있어 피의사실을 알려주지 못한다는 식으로 핑퐁 게임을 하고 있다. 기사의 기본 요건이 되는 범죄 시점, 피해자 규모, 피해 액수 등을 알 방법이 없으니 취재 기자 입장에선 난감하다”고 말했다.  


부산이나 강원 지역 역시 비슷한 분위기다. 일부를 제외하곤 검거사례는 비공개 원칙을 고수하거나 정보 공개 창구를 일원화하는 식으로 언론 대응을 하고 있다. 부산 지역의 한 기자는 “부산은 그나마 언론 대응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어 보도자료도 큰 변화 없이 나오고, 아직 기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면서도 “경찰 내부에 원칙적인 지침이 내려왔다는 소리가 들린다”고 전했다.

◇이중잣대 못 버리면 문제 사라지지 않아
다만 일부 기자들은 당장 취재에 불편은 있을지라도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처벌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울산 지역의 한 기자는 “고 노무현 대통령 사례에서 보듯 그동안 수사기관이 피의자 망신주기 차원에서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문제가 있지 않았느냐”며 “이 때문에 이번 사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기자들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수사기관이 특정 목적에서 언론에 정보를 제공하고 언론이 이를 ‘받아쓰기’ 하면서 그동안 의도적인 여론몰이를 하는 사례가 다수 있었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명품시계를 받아 논두렁에 버렸다는 보도가 대표적 사례로, 이후 검찰이 2010년 수사공보 준칙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수종 언론중재위원회 교육본부장은 “예컨대 피의자 신상공개만 놓고 보더라도 신상공개위원회가 들쭉날쭉한 기준으로 범죄자의 얼굴 공개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며 “독일에선 고유한 역사적 의미나 공적인 인물의 흉악 범죄 외에 일반인의 범죄 행위는 그 자체만으론 공적 사안으로 보지 않는다. 대중의 공분을 산 범죄 행위라도 피의자의 인격권, 존엄을 더 중시한다”고 말했다.


반면 그 반대편에서 국민의 알 권리가 피의자의 인권에 우선한다는 이들도 있다. 피의사실 공표죄로 보도에 제한이 발생하면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논리다. 허윤 법무법인 예율 변호사는 “원칙적으로 피의사실 공표죄가 알 권리에 우선한다고 보지만 알 권리도 배제할 수 없기에 이를 충족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본다”며 “검찰과 경찰 모두 공보준칙이 있는데 준칙 자체를 좀 더 엄격하게 다듬고 그 준칙이 맞는지, 정당한지, 이 정도면 알 권리가 충족됐다고 얘기할 수 있는지 따져야 한다. 지금 문제는 검경이 자의적 기준을 적용해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론과 국민의 합의를 거친 준칙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검·경이 공보준칙을 다듬는다고 하더라도 피의사실 공표 문제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시각도 있다. 국세청이나 식약청 등에서 활동하는 특별사법경찰관이 적발 내용을 보도자료로 내고 검찰에 송치하는 경우는 막을 수 없어서다. 게다가 언론이 취재를 통해 피의사실을 보도하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다. 특히 언론의 피의사실 보도에 대해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일관된 이중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고 해법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된다.


10여년간 검·경을 취재해왔던 임찬종 SBS 기자는 “여당 관계자에 대한 피의사실을 보도하면 야당은 좋아하고 여당은 피의사실 공표를 범죄화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며 “이 이중 잣대 때문에 피의사실에 대한 보도 자체가 나쁜 것이 돼 버리는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진지하게 논의되고 냉정하게 검토돼야 할 합리적인 기준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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