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님이 가주시면 안 돼요?"...스텔라데이지호와 마주했다

[인터뷰] 김영미 PD(시사IN 국제분야 전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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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망망대해에 가라앉았다. 육지에서 3000km 거리. 가도 뭐가 나올 거란 보장이 없었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워낙 멀고 워낙 비싼 곳이기도 했다. ‘통밥’을 굴려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안 가고 싶었다. 다만 실종선원 가족의 부탁 하나를 거절치 못했다. “PD님이 가주시면 안 돼요?” 김영미 PD(시사IN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는 그래서 갔다. 67일간 남미 3개국 등을 돌며 스텔라데이지호를 취재했다. 200자 원고지 77매 분량의 취재기가 나왔다. 

 

김영미 PD(시사IN 국제분야 전문 편집위원)

▲김영미 PD(시사IN 국제분야 전문 편집위원)


배는 2017년 3월31일 남대서양 한가운데서 V자 모양으로 쪼개졌다. 한국인 선원 8명과 필리핀인 선원 14명이 실종됐다. 1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침몰 원인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 국민의 실종을 현장 취재한 언론사가 없었다. 김 PD는 “언론인으로서 면피 의식으로 간 것”이라고 했다.


“못 간단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 말씀은 드렸어요. 나만 가고 나머진 안 갔고 그러지 마시고 우리 언론이 가는 걸로 이해해주시라고. 진짜 하나도 (새 팩트가) 안 나올 수 있다고 하고 갔어요. 면피만 하려 했어요. 길어야 한 달? 한 달 지나고 가족분이 부탁하시더라고요. ‘더 알아내서 오셔야 해요.’ 못 나오죠.”


배 추적은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지난해 늦여름 우루과이에 도착했다. 황당했다. 아무도 스텔라데이지호에 대해 몰랐다. 현지 기자들도 그랬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프랑스까지 비행기만 총 17번을 갈아타는 취재일정은 막막함의 연속이었다. 남미의 치안 상태도 걱정이었다. 갱단이 집중된 항구 주변은 특히 사정이 좋지 않았다. ‘전선 없는 전쟁터’ 같았다. 긴장을 놓지 못했다. 브라질 리오에선 3층에 숙소를 잡았다가 다음날 11층으로 숙소를 옮기는 일도 있었다. 밤새 총소리가 너무 가까이 들려 “빗맞아도 죽겠다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시사IN의 지원, 귀국 후 방송으로 보전된 금액을 제외하더라도 약 7000만 원의 자비가 들었다. 적금을 깨서 분쟁지역을 취재하고 다큐를 만든 게 그가 걸어온 길이다.


김영미 PD가 우루과이 기자협회 소속 기자를 취재하는 모습. (시사IN)

▲김영미 PD가 우루과이 기자협회 소속 기자를 취재하는 모습. (시사IN)


“누군가는 해야 되잖아요. 목돈을 모아서 취재하러 가고 또 모았다가 가고 그렇게 사이클을 돌리는 건데요. 스텔라데이지 취재는 자비가 아니면 갈 수가 없었어요. 누군가는 감당을 하고 먼저 가야 얘기가 풀리기 시작하는 거죠. 회수 못 해도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면피는 했잖아요.”


배는 세계 곳곳에 있었다. 그는 흔들리거나 가라앉는 배를 찾아 올라탔다. 그곳 여자와 아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결혼 후 5년 만인 2000년“아들과 먹고 살려고” 일을 시작했다. 프리랜서 PD로 동티모르 다큐를 만들었고, 1년 반 가량 아침방송 PD일을 했다. 모든 걸 정리하고 이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파키스탄, 시리아, 소말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등 분쟁지역을 찾았다. 다큐를 만들고, 기사를 썼다. ‘분쟁지역 전문 PD’로 불리게 된 과정이다. 몇 번의 유혹이 있었지만 그는 언론사 입사를 거부한 채 느슨하게 시사IN에 몸담고 있다.


“전쟁터는 정말 약육강식이에요. 그들이 제일 약한 사람들이고 전 그냥 사람 이야길 좇은 거고요…언론인이 회사원 역할을 하긴 힘들다고 생각해요. 언론은 이윤을 남기면 안 되는데 회사는 이윤을 남겨야 하고 거기서 상충해요. 어렵게 프리랜서를 고집하고 있어요. 대신 재고 따질 게 줄어요. 국민이 알아야 하는 거냐 했을 때 답이 심플해져요.”


그리스 선박 엘피다호 선원들이 표류하던 스텔라데이지호 선원 2인의 구조를 앞둔 모습.(시사IN)

▲그리스 선박 엘피다호 선원들이 표류하던 스텔라데이지호 선원 2인의 구조를 앞둔 모습.(시사IN)


배 안의 사람을 마주한 이에게도 상처는 남는다. 그는 매번 비행기를 탈 때면 “다시 못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조차 오토바이가 옆에만 붙어도 경기를 일으킨다고 했다. 환각을 느낄 때도 있었다. 트라우마 치료 등을 위해 3년 간 미국에 머물기도 했다. “제가 지금 개띠인데 딱 환갑까지 12년 남았더라고요. 머리가 건강하게 돌아가는 그때까지만 하려고요. MRI를 매년 꼭 찍어요. 취재에 영향을 미치니까…희생 이런 게 아니라 이 직업에 발을 들였으니 해야 되는 거 같고요. 저 중동 안 좋아해요. 거기 할 일이 있으니 가는 거지.”


배는 차가운 바다에 있다. 실종선원 가족은 차가운 광화문 광장에서 수색과 침몰 원인 규명 등을 요구하고 있다. 선박 블랙박스를 확보해야 하지만 국회는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정부의 노력 역시 미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PD가 남미 취재 시 우루과이 국방부에 요구한 관련 사진은 기관 간 소송 국면에 접어들었다.


“너무 운이 없었어요. 너무 멀었고, 특수 직업이었어요. 사람 수도 적었고 바로 대선 정국이 됐어요. 구조 상황이 안 되는 나라에 둘러져 있었어요. 그런데 국가는 국민을 기억해야 돼요. 미군은 6·25때 만 명이 얼어 죽은 장진호 사건 유해를 하나라도 더 데려오려고 해요. 망망대해에 돈 들이는 게 실효성이 없다? 그건 자본의 논리지 인도주의가 아니죠. 한 사람이 빠졌어도 국가가 최선을 다 해주길 바라는 거예요.”


김영미 PD가 스텔라데이지호 블랙박스 수색과 관련해 2009년 대서양에서 추락한 에어프랑스 447편 유가족협의회로부터 사고 수습 과정을 듣고 있다.(시사IN)

▲김영미 PD가 스텔라데이지호 블랙박스 수색과 관련해 2009년 대서양에서 추락한 에어프랑스 447편 유가족협의회로부터 사고 수습 과정을 듣고 있다.(시사IN)


※ 김영미 PD는 <스텔라데이지호의 진실을 찾아서>(가칭) 단행본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스토리펀딩을 진행 중입니다. 해당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18571


※67일간의 취재 후 나온 스텔라데이지호 추적기는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0827



최승영 기자 sychoi@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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