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 ‘청년 실업’ 등에 대한 수많은 비판은 매우 중요했고 현재도 그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비판이 문제해결의 담론을 자동적으로 제시해 줬던 건 아니었다. 대안적 담론으로 표현되어질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던 셈인데, 다행히도 지난 대선에 ‘경제민주화’라는 언어가 제시되었고 이는 어려운 경제 현실과 관련하여 비판을 넘어서 대안적 혹은 생산적 담론으로 작동할 하나의 계기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난 4년간 ‘경제민주화’ 담론은 애초에 제시된 그 상태에서 더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비판적 담론은 매우 풍성하게 제시되었는데 ‘흙수저’나 ‘헬조선’ 같은 언어들이 그것이다. 잘못된 현실을 드러내고 성토하고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데까지 강하게 이끌어내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언어들이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경제민주화가 필요한 건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무얼 해야 할 지에 대해서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나마 최근 야권 유력 대선 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민 성장’이란 언어를 제시하며 해당 담론에 불을 지폈다. 해당 내용이나 문재인 전 대표 개인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 경제민주화라는 대안적 담론과 맥을 같이 하는 표현이었다. 나아가 차기 대선에서 경제민주화 관련 담론에 불을 붙일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할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하지만 정작 언론이 주목한 건 국민 성장도 경제민주화도 아닌 전 외교부장관의 회고록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해당 회고록에 나온 문재인 전 대표의 발언이 핵심 이슈로 등장하더니, 등장한 이유를 사람들이 채 이해하기도 전에 정치권과 언론은 손에 손을 잡고 네거티브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어 버렸다. 이런 상황이라면 경제민주화 이슈가 과연 차기 대선에 주요 담론으로 다뤄질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 보인다.
사실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다. 긍정적이고 대안적인 정책들이 언론에 많이 소개되어야 한다고 다들 말하지만 막상 그런 적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난 대선만 해도 NLL 논란에 거의 모든 언론이 뛰어 들었는데 지금 그것이 우리의 사회 현실에 도대체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뒤돌아보면 한숨만 나온다.
물론 네거티브 공방의 1차적 책임은 흑색선전에 몰두하는 정치권에 있다. 하지만 정치권의 네거티브가 이뤄지는 장소는 분명 신문의 지면이고 방송의 화면이다. 따라서 네거티브에 사회적 관심이 매몰되어 경제민주화처럼 정말 중요한 이슈가 가려진다면 그 책임에서 언론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언론 입장에서 한참 뜨거운 시의적 이슈를 무조건 외면할 수 없음을 안다. 그렇다면 과거 ‘무상급식’ 논란처럼 비록 네거티브 논란을 거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이득으로 귀결되는 ‘언어’로 바꿔 표현하면 어떨까? ‘무상급식’이 우연히 그런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좀 더 작정하고 그런 표현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올바르면서도 동시에 ‘능력 있는’ 언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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