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는 공영방송…스스로 보도통제 말이 되나"

2년전 청와대 보도개입 폭로
'이정현 녹취록' 이상한 침묵
"보도하려면 많은 걸 걸어야"
수뇌부·경영진 눈치보기 급급
"차라리 국영방송으로 바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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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가 자사 뉴스를 통해 청와대 등의 보도개입을 폭로했다. 메인뉴스인 ‘뉴스9’ 등을 통해서다. 2년 전 길환영 전 사장의 퇴진 국면에선 그랬다. 반면 현 KBS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을 보여주는 육성 녹취가 공개됐는데도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다. 보도국 기자들은 잇따라 연명 성명서를 게시하고 간부·경영진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반면 회사 전체의 경직된 분위기와 뚜렷해진 기자 선·후배 간 분열 등을 두고 자조와 함께 무기력, 피로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문제는 기자들이 안에서 싸우기 힘들어 질수록 공영방송의 보도 풍경은 더 황폐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침묵하는 KBS…뿔난 기자들
“진짜 궁금하다. 간부들이 정말 속으로도 그게 보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KBS 는 침묵하고, 기자들은 화가 났다. 지난달 30일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언론시민단체가 ‘이정현 녹취록’을 공개하며 진보·보수지가 한목소리로 청와대 등을 비판하며 파문이 인 가운데 관련보도에 침묵하는 KBS를 지켜보는 상당수 기자들의 속내다.


KBS 기자들은 지난 5일 27기를 시작으로 29·30·31·33·34·35·38·42기가 잇따라 연명 성명을 게시하며 “입을 다문” 자사 보도를 지적하고 나섰다. 주니어부터 시니어 기자까지, 이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다.


시 니어 연차 A기자는 “국민적 관심사는 물론 KBS의 정치적 독립, 보도 공정성, 공적책무와 다 관련 있는 사안이다. 추정만 하다가 2년 만에 구체적인 증거가 나오는 초유의 일이 터졌는데 스스로 보도 통제를 하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보도 이전에 KBS 사장이나 경영진이 공식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KBS는 관련 사안을 지난 11일 ‘뉴스9’을 비롯해 ‘인터넷뉴스’, ‘뉴스광장’ 등을 통해 전하긴 했다. 다만 여야의 정치적 공방이라는 맥락 안에서만 다뤘다. 야권에서 제기되는 일종의 주장(<2野, “이정현 의원, 보도 개입 논란 사과부터 해야”>)으로 치부하거나 당 대표 경선 출마 의사를 밝힌 이 의원(<이정현 “한국 정치 바꾸겠다” 새누리당 대표 출마 선언>)의 해명을 부각시키는 식이었다.


▲KBS는 2년 전 보도개입과 맞물린 길환영 사장 퇴진 국면에서 자사 메인뉴스 등을 통해 관련 사안을 상세히 전했다. 하지만 현재 KBS는 사실관계에 대한 명확한 설명 없이 여야 정치권의 공방 수준으로만 이를 다루고 있다. 사진은 2014년 5월17일자 KBS ‘뉴스9’ <‘KBS 보도 개입설’ 길 사장 부인, 청와대 공식 입장 없어> 리포트. (KBS 홈페이지 갈무리)

이는 지난 2014년 길환영 사장 퇴진 국면에서 KBS가 ‘뉴스9(2014년 5월17·19일)’과 ‘뉴스라인(2014년 5월16일)’, ‘뉴스광장(2014년 17·20일)’ 등을 통해 내부 문제를 공론화한 방식과는 다른 태도다. 당시 KBS는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청와대 보도개입 폭로와 부장단 사퇴, 기자협회 제작거부 소식 등의 리포트를 냈지만 현재는 이를 직접 다룬 단신기사 하나 나오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B기자는 “(2년 전 길환영 사장 퇴진 당시) 같은 사안으로 파업에 참여했던 간부들이 지금은 나서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보도를) 가로막는 건 당연히 문제”라며 “상황이 악화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현 녹취록 왜 못 나오나
그 때는 맞았던 게 왜 지금은 틀린가. 왜 2년 전엔 나간 보도가 지금은 불가능할까. 상당수 기자들은 이번 사태의 본질을 “KBS 수뇌부의 청와대 눈치보기”로 보고 있다. 특히 부쩍 경색된 보도국 분위기는 보도 전반에 대한 논의 자체를 증발시켜 내부에선 최소한의 문제제기마저 어려워졌다고 기자들은 말한다.


지난 3월 결성된 ‘KBS기자협회의 정상화를 촉구하는 모임’에 이름을 올린 C기자는 “(녹취록 보도는) 우리 의사에 의해선 못할 거다. 편집회의서 (간부 중) 하자는 사람도 없을 거다. 하려면 많은 걸 걸어야 하는 구조, 분위기”라고 전했다. 지난해 12월 편성규약에 따라 평기자 대표로 편집회의에 참석한 KBS기자협회장의 의견 개진을 두고 보도국 간부들이 “편집권 침해”라며 성명을 낸 사태는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간부급과 평기자들의 인식 차 역시 극명히 갈라진다. ‘정상화 모임’에 이름을 올린 D기자는 KBS가 관련 보도를 해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첫날에만 보도를 안했고, 정치부 쪽에서 국회 대정부질문 등을 통해 기사를 쓰고 있지 않나”라면서 “후배들이 올리는 걸(성명) 보면 뭉뚱그려 안 했다고 비판하니까 그게 아쉽다”고 했다. 그러면서 “녹취록에서 김시곤 전 국장이 의연히 대응했고 결국 청와대 요청이 안 받아들여졌다. 공론화가 돼 버렸는데 앞으로 청와대에서 누가 전화를 하겠나”라고 덧붙였다.


▲국회 상임위 관련 소식 중 하나로 ‘뉴스9’을 통해 전해진 <나향욱 “죽을죄” 사죄…‘이정현 녹취록’ 공방> 리포트. (KBS 홈페이지 갈무리)

평기자 E, F가 “기계적 중립마저 저버린 정부여당 편향의 보도”, “지나친 대북보도로 안보 불안감을 조성, 오히려 안보에 폐를 끼치는 보도”로 KBS 뉴스 전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간부급 D기자는 “북의 핵·미사일 실험이 발생한 상황과 안보 최우선에 따른 보도 불가피” 등을 드는 식이다.


주니어 연차 G기자는 “간부들은 녹취록 자체를 외부 언론의 KBS 무너뜨리기라고 규정짓고 휘말릴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 같다”며 “그럼 그때(파업)도 동참하지 말았어야지 이게 이중잣대가 아니고 뭔가”라고 되물었다.


이에 대해 정지환 KBS 보도국장에게 ‘녹취록’ 등 보도 전반과 관련 내·외부 비판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수 차례 전화를 하고 문자를 남겼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무력감·피로…KBS 기자들의 현실
KBS 기자들은 이번 사태가 MB정권 이후부터 누적된 무력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국민의 방송’이 안고 온 적폐와 당면 문제를 함께 드러내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있다.


KBS 의 보도 침묵을 두고 지난 5일부터 12일 현재까지 연명 성명을 제출한 기수는 총 아홉 기수다. 하지만 지난해 ‘훈장’ 불방 사태와 올해 공정방송 감시활동을 벌여온 기자들의 징계 건을 두고 들불처럼 기수 성명이 나온 것과는 달리 ‘페이스’가 더뎠다. 특정 아이템 불방이나 가까운 선·후배의 즉각적인 피해 등과는 성격자체가 다른 사안이지만 “성명서를 아무리 써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현실”, “체념과 포기의 정서를 갖게 된 분위기”도 한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KBS 기자들이 겪는 피로는 특정 사안이 발생했을 때만이 아닌 상시적인 일이 됐다. 특히 지난 3월 출범한 ‘정상화 모임’은 사내에서 기자들의 상호 불신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H 기자는 “암묵적으로 누가 이런 성향이다 이런 건 있었어도 일할 땐 선·후밴데 정상화 모임 명단으로 가시화되니까 이젠 그게 안 된다”며 “이름 올린 분들은 ‘후배들이 싫어할 거’라는 자격지심이 있고, 후배들도 그런 선배와 자리를 안 가지려 한다. 살벌한 조직이 돼서 갈등이 계속 확대·재생산되는 모양”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고대영 사장 취임 후 기자협회와 노조 등 내부 기자들의 목소리 수렴 장치를 무력화하려는 시도, 경력기자 채용을 통한 사측의 ‘노-노’ 갈등 야기 역시 비판하며 “정상적인 문제제기와 토론·토의 모든 장치들이 무력화된 마당에 초유의 사태가 터져 평소보다 기자들이 더 무력감에 빠졌다”고 전했다.


시 니어 연차 I기자는 KBS의 침묵에 대해 비판하며 이번 사태가 내부의 고질적인 직종갈등과 맞닿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자협회나 노조 차원에서 공정방송을 위한 활동을 한 기자들이 취재기자·간부들에게 전화를 한 걸로 압력이라며 징계를 하지 않았나. 보도 독립성에 굉장히 엄밀한 잣대를 갖고 있다는 건데 청와대 홍보수석이 전화해 요구한 걸 두는 게 말이 되나”라며 개탄했다. I기자는 “결국 당시 분연히 일어선 간부들의 결기는 PD출신 (길환영) 사장을 몰아내려는 정치적인 판단의 결과일 뿐이었다는 게 확인된 셈이다. 실제 보도본부는 (기자 출신 고대영 사장의) KBS 수뇌부와 더 일체감을 느끼는 것 같다”면서 “‘사드 배치’ 발표를 보니 왜 그렇게 북한 보도를 했는지, KBS가 얼마나 정부와 유기적으로 협조가 되는지 이해가 됐다. 차라리 국영방송으로 바꾸면 떳떳하기라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승영 기자 sychoi@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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