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좌파 대세론 흔들린다

[글로벌 리포트 | 남미]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1990년대 말부터 남미에서 위력을 발휘해온 이른바 좌파 대세론이 힘을 잃는 분위기다. 경제위기가 직접적인 이유다. 저성장과 물가상승으로 실질소득이 감소하고 일자리까지 줄어든 서민 대중들의 좌파정권을 바라보는 시선이 갈수록 차갑다.


남미에서는 1999년 베네수엘라 대선에서 우고 차베스가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좌파정권이 잇따라 등장했다. 현재 남미대륙 12개국 가운데 콜롬비아와 파라과이를 제외한 10개 나라에서 좌파가 집권하고 있다.


그러나 좌파의 견고한 집권 기반에 최근 들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재선에 성공한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은 사상 최악의 경제위기와 잇단 정·재계 비리 스캔들로 휘청대고 있다. 국정 지지율이 10%를 밑돌면서 탄핵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도 지지율 추락으로 고민이다. 2006~2010년 첫 번째 임기를 마칠 당시 85%라는 믿기 힘든 지지율을 기록했으나 지금은 30%에도 미치지 못한다. 예전만 못한 경제 실적에 아들 비리까지 겹치면서 도덕성에도 상처를 입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22일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투표와 12월6일 베네수엘라 총선은 남미 좌파 대세론의 향방을 점칠 수 있는 기회다.


아르헨티나에서 지난달 말 치러진 1차 투표 결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내세운 다니엘 시올리와 시장주의를 표방하는 야당의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득표율 1~2위로 결선투표에 올랐다.


여론조사에서 결선투표 예상득표율은 마크리가 7~8%포인트 정도 앞서고 있다. 마크리가 승리하면 아르헨티나 현대 정치사를 지배해온 페론주의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페론주의는 1940년대 후안 도밍고 페론 전 대통령이 주창한 국가사회주의 정치 이데올로기다. 서민과 노동자 등 기층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하며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아르헨티나 사회학자 비센테 팔레르모는 “마크리가 승리한다고 해서 남미 정치지형에 당장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겠지만, 그가 정부를 효율적으로 이끈다면 좌파 대세론의 퇴조를 부추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대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선거일을 앞두고 좌파 진영이 무섭게 결집해 판세를 뒤집은 사실을 고려하면 대선 결과를 쉽게 점칠 수 없다.


베네수엘라 총선에선 우파 야당의 승리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저성장과 살인적인 물가, 정정 불안이 현 집권세력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키우면서 총선 전망을 어둡게 만든다는 평가가 나온다. 총선이 우파 야당의 승리로 끝난다면 차베스가 생전에 꿈꾼 ‘21세기형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이 급속도로 빛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강경좌파로 분류되는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네 번째 집권에 도전한다. 10년째 집권하고 있는 모랄레스 대통령은 비교적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으나 지방선거에서 전략적 요충지를 내주면서 4선을 향한 행로가 평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예고했다.


장기집권에 대한 피로감과 동시다발로 나타나는 경제위기, 사회 양극화 심화, 권력형 부정부패 등은 남미 좌파정권들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우루과이 정치평론가 마우리시오 라부페티는 “좌파정권에 대한 실망감은 민중의 정의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남미 좌파정권들이 직면한 위기가 정치 이데올로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는 경제위기에 대한 처방에 만족하지 못한 서민들이 좌파 정권에 대한 지지를 잠시 유보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남미 좌파 대세론의 명운은 역시 경제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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