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KBS '훈장 2부작'의 비극

KBS '훈장' 불방 위기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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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수립후 훈장 수여 내역 조명
기획·제작에만 3년 공들인 탐사보도
방송 연기에 또 연기·제작진 돌연 전보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내용 삭제 지시  


참담하다고 했다. 하지만 막연히 짐작만 할 수 있는 심정이었다. 하루치의 공과 노력, 생각, 가치를 담은 보도가 빛을 보지 못해도 속상하고 아픈 일이다. 그런데 3년 가까이 공들여 온 프로그램이 석연찮은 이유로 방영이 미뤄지고, 방송이 될지 안 될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그 마음을 안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기약 없이 방송이 미뤄지고 있는 ‘훈장 2부작’의 제작진, 이병도 KBS기자는 지난 9일 KBS신관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이를 “자기 새낀데 세상에 내놓지 못하는 아픔”이라고 토로했다. 앞서 제작진은 이승만·박정희 정부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 때문에 ‘훈장’의 방송이 지연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훈장’ 방송 순연의 기록
KBS ‘훈장’ 제작진은 지난 9월8일 ‘무엇이 그리 두렵습니까’라는 제목의 성명을 냈다. 성명은 ‘훈장 2부작’의 ‘불방’ 위기에 대한 호소였다. 당시 제작진이 낸 성명에 따르면 ‘훈장 2부작’은 당초 KBS 1TV ‘시사기획 창’을 통해 6월과 7월에 각각 한 편씩 방송이 예정됐다가 5월 말 메르스 사태가 터지면서 7월 말로 연기됐다.


▲KBS 프로그램 ‘훈장’의 방송이 기약없이 미뤄지고 있다. ‘훈장’은 대한민국의 서훈정보를 통해 광복 70주년을 돌아보는 기획으로 3년 가까이 준비돼 왔다. (뉴시스)

그런데 6월 말 KBS의 ‘이승만 정부 망명 요청설’ 보도 후 ‘훈장 2부작’의 방영은 돌연 “허공에 뜨게” 된다. 7월 말 훈장 방송 예정일엔 ‘훈장’보다 늦게 발제된 아이템이 방송됐고, 8월에는 광복 70주년 특집프로그램 줄 편성으로 ‘훈장’이 편성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훈장 2부작’은 돌연 방송 목록에서 사라져버렸다.


이 기자는 “정상적인 프로세스라면 10월엔 방송을 해야 하는데 응답이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불방이 되겠구나 싶었다”고 회상했다.


새노조는 당시 메르스 사태로 기존 ‘훈장’을 방영할 예정이던 프로그램의 아이템들이 순연됐고, 8월 ‘광복 70주년’, 9월 ‘한국경제의 미래 4부작’ 편성이 겹쳐 방송일이 10월 이후로 늦춰졌다는 사측의 해명에 대해 “메르스 사태로 ‘시사기획 창’ 아이템이 나가지 못한 것은 3주에 불과하고, 관련 아이템이 끝나고 광복 70주년 특별기획이 나갈 때까지 6주간 일반 아이템이 나갈 동안 ‘훈장’아이템은 편성되지 못했다”고 반박한 바 있다.


당시 성명에서 제작진은 시사제작국장과 탐사제작부장이 ‘훈장’이 민감한 내용이라며 지속적으로 기획안과 프로그램 내용 제출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제작진은 수차례 기획안을 전달했고, 프로그램 요약본과 가원고까지 제출했다. 지난 9월2일에는 팀장 데스킹까지 끝낸 편집용 원고까지 전달했다.


이 기자는 이 같은 절차에 대해 “두 달째 데스킹을 한다는 걸 납득하기 어렵다. 통상적으로 KBS 주간 프로그램의 경우 방송일자를 잡고 거기 맞춰 취재와 제작에 들어간다. 그런데 데스킹이 끝나면 방송을 내보내겠다는 건 비정상적인 것”이라며 “방송을 내려는 의지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더욱이 지난 9월에는 ‘훈장’ 제작에 참여한 팀장과 기자들에게 돌연 인사가 났다. 팀장은 7일자로 네트워크부로, 취재기자 두 명은 14일부로 각각 디지털뉴스국 디지털뉴스부, 보도국 라디오뉴스제작부로 발령이 났다. 맡은 직능 때문에 부서를 옮길 수밖에 없는 기자를 제외하고 팀장과 모든 기자들이 제작 완료 때까지 부서를 옮기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막무가내였다.


사측은 “정기 인사이며, 발령 부서의 업무협조를 구해 제작하게 해주겠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새 팀장이 온 상황에서 전임 팀장이 제작에 다시 참여하긴 불가능했고, 라디오뉴스제작부로 간 기자는 지난달 말 업무협조가 해제돼 현재 두 명만이 ‘훈장’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측은 단체협약과 KBS방송편성규약 등에 따라 규정된 공정방송위원회(공방위)와 보도본부 편성위원회(보도위) 등을 통해 ‘훈장’문제를 논의하자는 요구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지난 9월17일 양대노조의 임시 공방위 요구를 “데스킹 과정에 있기 때문에 지켜봐 줄 것을 조합에 설명했다”며 거부했고, KBS기자협회의 보도위 개최 요구에도 지난 6일 거절을 통보해왔다.

왜 무한정 미루나?
그렇다면 사측은 왜 이렇게 오랜 기간 ‘불방’ 의혹을 받으면서도 방송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것일까. 이를 두고 청와대 눈치보기로 불방의 수순을 밟고 있다는 의혹이 수차례 제기된 바 있다.


‘훈장’ 제작진은 지난달 26일 재차 성명을 내고 시사제작국 간부들이 두 달 가까이 데스킹을 보면서 각 편에 대해 세세한 지침을 내렸고, 특히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다룬 ‘친일과 훈장(2편)’에 대해서는 원고의 3분의 1을 삭제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밝혔다. 이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5·16쿠데타 직후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총리에게 보낸 친서 등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친서에는 “귀하에게 서신을 드리게 된 기회를 갖게 되어 극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는 인사말이 포함됐다. 제작진은 “부장의 의견을 수용해 관련 부분을 삭제했다. 그 다음 요구는 무엇이었나? 일본인 훈장 관련 내용 전체를 다 삭제하는 것이었다”며 “제작진이 양심을 저버리거나, 실체적 진실에 반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는 한 2편은 불방될 것이 명확해 보인다”고 했다.


제작진은 성명에서 ‘간첩과 훈장(1편)’의 데스킹이 마무리돼 지난달 20일 방송예정이었지만 돌연 특집이 잇따라 편성되면서 방영이 또 다시 미뤄졌다고 전했다. 제작진은 ‘친일과 훈장(2편)’의 경우 제작진과 간부의 관련 논의가 완전히 중단됐다고 했다. 총 6차례 데스킹을 거치면서 원고의 상당 부분이 수정됐지만 시사제작국 간부들은 ‘수정’ 차원이 아닌 ‘새로운 프로그램’을 요구하고 있다고 제작진은 설명했다.


‘훈장 2부작’의 무기한 방송연기를 두고 양대 노조와 직능협회 등은 KBS의 사장선임과 무관치 않다는 비판을 수차례 제기해왔다. 사장선임 정국을 앞두고 청와대와 이인호 KBS이사장의 눈치를 보는 것이란 논지였다. 제작진은 앞서 ‘훈장’ 방송에 대한 분위기가 바뀐 순간으로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설’ 보도를 꼽은 바 있다. 해당 보도 후 극우 성향 단체·매체들이 반발했고, ‘뉴라이트 역사학자’ 출신 이인호 KBS이사장이 해당 보도를 안건으로 긴급 이사회를 소집하는 일이 벌어졌다.


방송연기와 관련해 탐사제작부장은 지난달 26일과 29일 사내게시판을 통해 “수신료 현실화를 위한 공영방송 역할을 주제로 한 전사적인 편성 조정으로 순연됐을 뿐”이라 반박했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서에 대해서는 “2009년 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는 이유로 6·25전쟁영웅에게 수여된 무공훈장 수여가 적절했는지 따지는 게 과연 타당한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KBS만 할 수 있는 일인데…”
이병도 기자는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이건 사실 KBS라서 할 수 있는 일이다. KBS의 탐사보도팀이라 할 수 있는 대하 프로젝트인데 이런 걸 못 내게 하는 게 속상하다”고 했다.


KBS ‘훈장’은 탐사보도팀이 2013년 초부터 준비해 온 프로그램이다. 대한민국에서 수여된 훈장 70여만 건의 내역을 통해 광복 70주년을 돌아보자는 취지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누가 왜 ‘훈장’을 받았고 문제는 없는지를 알아보는 대기획이었다. 우리나라 신문방송사를 통틀어 한 보도를 위해 몇 년간을 투자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실제 탐사보도팀이 해온 노력을 보면 이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제작진은 2013년 행정자치부에 훈장 서훈자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지만 비공개 결정이 났다. 이의 제기를 했지만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결국 그해 4월 행정소송에 들어갔다. 길고 지난한 소송 끝에 2015년 1월이 돼서야 공개결정이 났다. 제작진이 서훈 정보를 손에 쥐게 된 것은 올해 4월이었다. 자체 취재를 통해 정부가 감춰 온 내역도 찾아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전체 훈장 내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소송비용을 지불한 것은 KBS였다. ‘친일과 훈장(2편)’의 취재를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작업을 하면서 1000만원의 예산도 집행했다.


논란을 예상한 제작진은 제작과정에서 팩트와 의견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데 신경썼다. 훈장의 사유와 종류, 규모 등의 팩트는 제작진이 생산하고, 해석은 진보와 보수 양쪽의 대표적 역사학자에게 맡겨 균형있게 담자는 생각이었다.


이 기자는 “‘간첩과 훈장’의 경우, 간첩조작사건으로 피해자는 억울하고 고된 인생을 살았는데, 가해자는 정부의 훈장을 받고 유공자가 돼서 사는 현실을 바로잡는다는 데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친일과 훈장’은 역사적인 사실을 전달해 다양한 해석을 전해 듣고 얘기해보는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훈장 2부작’의 방영은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제작진은 지난 6일 간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간첩과 훈장(1편)’의 원고 중 ‘조작’ 등의 문구를 수정해 제출한 상태다. 10일 KBS홍보팀을 통한 문의에 탐사제작부장은 “간첩과 훈장(가제) 제작진이 수정해 제출한 원고에 대해 데스크 중”이라고만 답했다. 2편에 대한 얘기도, 1편의 구체적인 방송날짜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이 기자는 “제작진이 답답하고 지치고 수모를 겪는 건 상관없다. 자율성과 양심, 이런 가치들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나가게 하고 싶다”며 “신임 사장이 온 후에도 싸울 게 있으면 싸우고, 대화할 게 있으면 대화하고, 방송을 내보내는 일에 성실하게 임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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