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KBS가 역사관 논란에 휘말리면서 기자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 최근 이승만,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를 담은 프로그램 ‘훈장’ 불방 사태가 나더니 제작에 참여한 팀장과 기자들이 타 부서로 전출됐다. 지난 7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본 망명을 타진했다는 ‘뉴스9’ 보도로 보도책임자들이 줄줄이 보직 해임됐다.
이사장의 역사관이 방송 프로그램에 영향을 주고, 징계성 인사가 이어지는 등 이념 논쟁의 유탄이 구성원들에게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KBS는 지난 10일 인사발령을 냈다. 보도본부 대상 50여 명 규모의 이번 인사에서 ‘훈장’ 제작에 참여한 탐사보도팀 기자 두 명이 각각 디지털뉴스국 디지털뉴스부와 보도국 라디오뉴스제작부로 발령(14일자)이 났다. KBS ‘훈장’ 제작진 및 탐사보도팀이 성명을 통해 “사측이 방송 프로그램 ‘훈장’시리즈의 방영을 기약 없이 미루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지 이틀만의 일이다. 제작에 참여한 탐사보도팀장은 지난 7일 네트워크부로 발령(8일자)이 난 바 있다. 당초 ‘간첩과 훈장’, ‘친일과 훈장’ 등 ‘훈장 2부작’은 6, 7월에 각각 한 편씩 방송이 예정돼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 망명요청설’ 보도 후 ‘훈장’보다 늦게 발제된 아이템이 먼저 방송에 나가는 등 탐사제작부장과 시사제작국장이 특별한 이유 없이 방송일자를 확정하지 않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훈장’의 방송일자가 계속 확정되지 않으면서 구성원들은 ‘불방’의 배경과 인사조치가 취해진 공교로운 시기에 의문을 키우고 있는 모양새다. 지난 7월 ‘이승만 정부 망명 요청설’ 보도로 논란이 불거진 후에도 KBS는 인사를 단행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KBS는 이승만 정부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본 망명을 타진했다는 보도를 했다가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회 등 보수단체로부터 포화를 맞고 내부에서 ‘굴욕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정정 보도를 내보냈다. 이후 해당 방송보도를 담당한 보도국 국제부 주간과 부장, 관련 인터넷 뉴스를 제작한 디지털 뉴스 국·부장이 인사조치 되면서 ‘징계성 인사’라는 의혹이 돌기도 했다.
이와 관련 KBS 기자·PD·방송기술인·경영협회 등 4개 직능협회는 지난 11일 성명을 통해 “훈장 2부작이 방송일도 정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다음 달 예정된 사장 선임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며 “뉴라이트 학자 이인호 이사장의 눈밖에 날 방송은 내보내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또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등도 이 같은 조치가 취해질 때마다 ‘(조대현 사장이) 이사장에게 충성맹세를 한 것’이라는 입장 등을 밝혀왔다.
KBS 한 구성원은 “이승만에 대한 보도가 늘상 있는 일은 아니지만 관련 아이템을 할 때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이승만 보도를 두고 임시 이사회가 소집되는 등 이사회가 개별 방송에 개입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의식하지 않을 수 있겠나”라고 되물었다.
실제 이인호 KBS이사장은 지난 7월 이승만 보도의 경위를 묻는다며 긴급 이사회까지 열었다가 다수 이사들의 반대로 안건상정에는 실패하는 ‘해프닝’을 벌인 바 있다. 이 이사장은 앞서 지난해 6월 “일본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교회 강연 중 발언이 공개돼 낙마한 문창극 당시 총리 후보자에 대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 “교회 강연을 보고 감동받았다”고 밝히는 등 ‘우익적 역사관’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KBS 한 기자는 “디지털퍼스트 움직임을 적극 이끌던 디지털뉴스국 등 부서장들이 역사관 논란으로 인사조치를 당하면서 의욕적으로 동참해 온 여러 새로운 시도들도 추진동력을 잃은 듯하다”며 “교체된 부서장들이 몸을 사린다는 걸 체감한다. 문제가 됐던 게 리포트 기자의 인터넷뉴스다 보니 뉴스 아이템을 의뢰하는 건수 자체가 확 줄었고, 디지털뉴스국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분위기가 됐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결국 역사관 문제에 휘둘려 KBS의 미래가 발목 잡히고 있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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