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기자들이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 기획보도가 무산된 과정을 비판하며 편집국장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편집국장이 경영논리를 내세우며 독립언론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고 새로운 수익 마련 등 혁신 시도는 미흡하다는, 근원적인 우려가 사태의 본질이란 목소리가 나온다. 경향신문 기자 48명(10~18년차)은 지난 18일 연명 성명을 내고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기획기사는 편집국장이 정부, 대기업과의 관계를 신경쓰다 무산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장은 독립언론을 위한 마지막 관문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 더 이상 국장을 신뢰할 수 없다. 경향신문의 미래를 함께 꿈꾸며, 소통할 수 있는 국장과 일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사태 촉발은 10년차 미만 기자 30명이 지난 11일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 기획보도에 사장이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을 해명하라”며 내놓은 성명이었다. 편집국 경제부 소속 기자들이 규제 사각지대에 있는 600개 기업 현황을 5개월 간 취재·분석한 기획보도를 하려 했지만 기사 계획이 철회되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당시 성명에는 편집국장 등 간부의 “편집인 회의에서 말이 나왔다”, “현대차·한화·SK가 한꺼번에 나오니 부담스럽다”, “일감 몰아주기 이슈가 핫하지 않다”, “정부가 경제활성화에 나서는 흐름에서 공감을 사기 어렵다” 등 발언이 기록됐다.
최초 성명 후 편집국장은 보도게시판에 해명글을 올렸다. 이기수 편집국장은 “주간·사장과 하는 회의에서 상하로 지시하고 막고 하는 일은 제 임기 내 없었다”면서 “(편집인 회의에서도) 원칙적인 얘기를 나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사 질과 관련해 “경향신문이 기획을 하는 원칙이나 승부호흡과 멀었다”, “새로운 게 없고 우리 신문도 주간경향도 많이 다뤘고 사람들도 다 아는 얘기”라는 평을 내놨다.
편집국 분위기가 진화되지 않으며 진행된 지난 13일 전·현직 경제부장들의 증언 청취에선 편집국장 설명과 배치되는 얘기가 나왔고, 결국 14일 기자 50여명이 참여한 확대 독실위 개최로 이어졌다. 기자들은 이날 오후 7시10분께부터 3시간 가까이 편집국장과 질답을 나눴다. 참석자 A기자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사과나 최소한의 유감 표명이 아니라 예의변명으로 일관해 분노한 기자들이 많았다”며 “기획 자체 완성도가 떨어졌다고 하는데 말이 안 된다. 그걸 보완하고 보충하는 게 윗선 몫 아닌가”라고 했다.
기획기사 무산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은 계기일 뿐 경영논리가 자리 잡은 편집국에서 느끼는 자괴감, 여전히 광고주에만 목매는 수익구조에 대한 위기의식이 근원에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10~18년차 성명에서 “편집인 회의를 투명화하고, 경향신문의 미래를 논의하는 데 평기자들이 참여하고 결정 권한을 가진 혁신기구를 마련한 것을 제안한다”로 드러나는 인식이다.
B기자는 “기자들이 ‘돈 대신 기사’라고 막무가내로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왜 모르겠나. 광고 외 수익모델이 없고, 비판의 대상이 광고주인데. 다만 어느 순간 선을 넘어버린 거다. 어려운 시절에 트라우마가 있는데 지금은 월급이 오르다보니 그 달콤함에 젖었다. 정부여당도 기업도, 아무도 못 조지는 언론사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신사업은 차치하더라도 편집국 디지털 대응도 온라인 기사가 전부라고 생각하니 저연차 기자들은 지쳐 나가떨어지는데 ‘열독률 안 떨어지고 있다’, ‘청와대가 우리 보고 바꾼 거다’ 얘길하면 답답해진다”고 덧붙였다.
C기자는 “확대 독실위에서 기자들 문제의식은 광고주 눈치보면서 기획단계부터 자기검열하는 거 아니냐. ‘독립언론 정체성’이 우리 자산인데 그럼 타 매체와 차이가 뭐냐. 우리도 경영논리를 너무 내면화한 거 아닌가라는 거였다. 국장이 추상적인 표현은 썼지만 (경영상)고려를 했다는 데서 이미 끝난 거다. 이번 일을 개선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D기자는 “우리도 선배가 되면 지금 선배들처럼 일해야 한다는 거 안다. 선배들을 미워하는 게 아니다. 매체 종사자 현실이 담긴 거라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편집국장이 편집국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경영논리를 내면화한 말을 한 게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안난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 사장 들어 젊은 기자들과 소통이 사라지며 누적된 불만이 있다. 앞으로 25~30년 더 회사에 다녀야 할 사람들이 미래지향적인 일들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데 그럴 기회가 없어졌다”고 부연했다.
이기수 편집국장은 19일 이번 사태에 대한 입장 등에 대해 “현재로선 결정된 게 없다”고 밝혔다.
최승영 기자 sychoi@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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