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저널리즘의 변화를 기대한다
연예뉴스가 폭주하는 세상이다. 스포츠 신문 뿐 만 아니라 종합일간지 기사와 방송 프로그램의 구석구석에서 연예인과 그 주변에 관한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인터넷 뉴스 포털이 역점을 기울이는 것도 연예계 이야기다.연예뉴스의 폭주는 그만큼 수요자가 많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사회문화적으로 바람직한 것인가의 논란은 차치하고, 이 현상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언론계는 연예뉴스를 공급하는 수준과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언론계는 연예뉴스를 ‘길거리 여자’ 취급을 해 왔다. 이를 내세워 장사를 해…
기자의 글에선 향기가 나야 한다
유리조각 같은 말들이 넘쳐난다. 후벼파는 언어가 화살로 총알로 날아다닌다. 잔뜩 경직된 말에선 적개심이 묻어난다. 오직 상대방을 겨눈 비난이 횡행한다. 맹목적 단죄의 언어 전쟁이 우리 곁에서 매일 지속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기자의 말이 무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무기는 혼돈을 정리하는 지성의 날카로움이 아니다. ‘너의 진영’을 겨냥한 ‘나의 진영’의 화살과 창으로 번득인다. 객관성을 가장한 뉴스는 작위적인 리드로 이미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인용되는 전문가의 따옴표 발언은 맥락에서 거두절미 일쑤다. 맞춤식 제목들은 ‘너의 진영’을
문광위원들은 정신차려라
방송위원회의 지상파 재허가 추천 심사에 대한 정치권의 압력과 간섭이 도를 넘고 있다. 제대로 된 정치권이라면 `거대 권력’으로 자리잡은 방송사에 대해 방송위가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심사하고 과오를 바로 잡도록 하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권은 되레 방송위를 압박하며 직접 자기네들이 심사하겠다는 투로 연일 감 내놓아라 배 내놓아라 하고 있다. 명백한 월권 행위라고 보여진다. 열린우리당은 심사가 진행 중인 시기에 특정 방송사를 거론하며 강도 높은 심사를 촉구해 문제를 키웠다. 대단히 부적절했으며 야당에게 빌미를 제공했다.
한국기자, 기자이기를 포기했나?
한국기자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너의 이름은 자이툰 부대. 한국기자는 네가 국가의 부름을 받고 모래폭풍이 휘몰아치는 이라크 사막으로 떠나던 날 너의 뒷모습조차 배웅하지 못했다. 너를 환송하지 못한 데는 그나마 핑계라도 있었다. 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서울공항에서 떠나가 주길 원한 측의 바람이 워낙 간절했으니. 공항에는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국방장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몇 개월. 한국의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에선 자이툰 부대와 관련한 그 어떤 소식도 비치지 않고 있다. 과연 한국 정부가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번째
기자들 복지, 작은 것부터 챙겨라
신문의 위기. 이 말은 기자들 가슴을 너무 멍들게 한다. 경기불황과 과열경쟁의 직격탄을 맞은 신문사들은 크든 작든 간에 저마다 경영난을 호소하고 있다. 이미 문을 닫은 지방신문도 있고 부도를 맞은 스포츠신문도 있다. 한때 4대신문의 반열에서 사세를 과시하던 중앙지 한곳은 수천억대의 빚으로 청산 얘기마저 나돌고 있다. 심지어 1~2년 내에 몇 개의 신문사가 더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나오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위 잘 나가는 몇 개의 중앙지를 빼곤 상여금을 제대로 주는 신문사가 거의 없다. 삭감과 반납의 형식으로
지방신문 사주들은 답하라
지방신문의 위기를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거론되는 것이 광고수입 감소다. 경영의 대부분을 광고에 의존하고 있는 지방신문의 입장에서 경기침체와 기업들의 투자심리 위축은 솔직히 심각한 수준이다. 10년 전의 광고 단가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오히려 과당경쟁에 따라 내려간 광고단가는 회복될 줄 모르면서 경영난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화되고 있다.기자들이야 정해진 임금을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누적되는 경영악화가 결국에는 근로조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기자사회 또한 자유스러울 수 없다. 심지어 어려운 경영난
기자의 자존심을 짓밟지 말라
기자 새내기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들만의 패기와 진지함, 열정도 그렇거니와 천하를 삼킬만한 호연지기와 참신한 문제 의식이 정말 부럽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심정이 마냥 흐뭇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절로 떠오르는 새내기 시절의 추억은 현실과 오버랩되면서 이내 씁쓸함으로 연결된다. ‘올드 미디어’로 전락,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신문기자들에게는 특히 그렇다.사실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택할 때부터 부(富)는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기자가 되고자 했던 것은 이른바 ‘올바른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