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와 슘페터가 손을 잡을 때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예언한 칼 마르크스가 죽은 1883년 바로 그해 현대 자본주의의 중흥을 이끈 두 경제학자가 탄생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케인스주의’의 태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창조적 파괴’로 유명한 조지프 슘페터는 1883년 같은 해 태어나 동시대를 살았다.케인스는 ‘유효 수요’의 부족이란 개념으로 공황을 진단하고, 수요 진작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1971년 당시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라고 밝힐 정도로 케인스 이론은 당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자본주
당신이 쓰는 부사(副詞)는 안녕한가
마흔 살에 난생 처음 대장 내시경을 받았다. 날마다 불을 뿜는 상사나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말단 직원이나 검진복을 입으면 순한 양 같다. 그 틈에 앉아 40년 만에 들여다볼 창자 속을 상상했다. 자못 불안했다. 이달 초 부사(副詞) 추적 조사를 의뢰할 때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질병에는 대체로 징후가 있다. 언어 생활도 마찬가지다. 번성하는 말과 쇠락하는 말이 그 사회를 가늠해준다. 어떤 부사를 점점 더 쓰고 어떤 부사를 덜 쓰는지 파악하면서 대중의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김한샘 연세대 교수가 1950년대부터 올해까지 신문기사(말뭉치
특별재판부, 세월호는 되고 양승태는 안 되나
‘특별재판부’ 신설 얘기가 무성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설치 등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권부와 거래, 일선 재판에 개입했다는 ‘사법농단’ 기소사건을 담당할 특별재판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이다. 서울중앙지법 부패사건 담당 재판부 상당수가 의혹에 연루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인 이상, 대상 사건 관련자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재판부가 재판을 하는 경우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우려에서다. 실제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을 보면 특별재판부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설치된다. 판사 여럿과 영장전담법관으로 구성되는데
영화 ‘미쓰백’과 ‘살아남은 아이’
처음에는 그저 장난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앳된 얼굴의 여자가 검지손가락으로 연신 꼬맹이의 이마를 밀고 있었다. 주의를 기울여보니 “이 바보새끼가” “멍청아” 따위 말이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아이는 서너 살쯤이나 됐을까. 저 상황에 개입해야 할까, 혹은 개입해도 될까…. 고민하던 사이 두 사람이 버스에서 내렸다. 여자는 아이가 메고 있던 어린이집 가방을 거칠게 낚아채 길 위로 던지듯 아이를 하차시켰다. 나처럼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한 할머니가 낮게 혀를 찼다. 버스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머뭇거렸던 기억은 죄책감이 되어 오래 마음
악시오스의 ‘똑똑한 간결함’서 배운다
“미디어는 붕괴됐다. 너무도 자주, 속이려 든다.”미디어 비평가의 주장이 아니다. 한 신생 언론사 출범 선언문에 담긴 말이다. 이 선언문엔 “독자들은 정보 홍수 속에서 허덕인다. 가치 있는 뉴스 찾기가 갈수록 힘들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독자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장담한다. 그 방법 중 하나로 ‘똑똑한 간결함(smart brevity)’을 내세웠다. 이런 당돌한 선언을 한 곳은 지난 해 1월 출범한 미국 뉴스 사이트 악시오스(Axios)다. 악시오스란 그리스어로 ‘가치 있는 것’이란 뜻이다. 폴리티코 창업자인 짐 반
대북 정책은 ‘철인 7종 경기’
2018년 내내 한반도 정세 격변이 진행되면서 대북 정책 성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북 정책을 공정하게 점검하려면 신뢰성 높은 체크리스트가 필요하다. 필자가 지난 20년 가까이 대북 정책 성공과 실패를 관찰한 결과 중요한 체크리스트는 7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대북 정책은 서로 다른 7가지 종목에서 골고루 우수한 성적을 거둔 선수가 승리하는 철인 7종 경기라고 할 수 있다.1번 종목은 남북 관계 관리다. 과거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북한을 압박과 제재 대상으로 보고 강경 일변도 정책을 추
상생 외면하다 부메랑 맞는 삼성과 현대차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이 17조를 넘어 사상 최대실적을 경신했다. 반도체는 그 75%를 차지해 톡톡히 ‘효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에 장비·부품을 공급하는 협력사의 표정은 밝지 않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상반기 평균 영업이익률은 40%에 육박한다. 하지만 반도체 장비업체는 13.5%로 3분의 1 수준이다. ‘그들만의 호황’인 셈이다.한 투자회사 대표는 최근 중국기업의 초청으로 베이징을 다녀왔다. 중국은 기술력이 높은 한국 반도체 장비·부품업체 인수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며 대규모…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정부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단순한 속담만은 아니다. 많은 연구들이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상대적 박탈감 이론(relative deprivation theory)’. 사람들이 돈, 명예, 권력 등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타인과 비교해 만족과 불만족을 느끼면서 비행, 일탈, 집단 갈등 등 각종 사회적 병리 현상을 유발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사회·경제적 환경이 개선된 상황에서 이전보다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집단행동에 주목했다. 이 결과 절대적 박탈보다는 상대적 박탈감이 보다 강한 체계적 좌절(syst
‘퓨마 사살’이 남긴 질문
지난 달 18일은 동물 뉴스 역사상 큰 획을 그은 날이었다. 외신들은 남북 정상회담과 ‘평양 공동선언’을 속보로 전하느라 바빴다. 정작 우리 국민을 붙잡은 뉴스는 달랐다. 대전 어느 동물원에서 일어난 ‘퓨마 사살’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질주했다. 사육장을 청소하고 문을 잠그지 않는 바람에 퓨마 한 마리가 달아났다. 8년생 암컷, 체중은 60kg이었다. 대전 시민들은 ‘외출 자제’ 재난문자를 받았다. 퓨마는 마취총에 이어 엽총을 맞고 5시간 만에 사살됐다. “왜 죄없는 퓨마를 죽였느냐”는 동정론이 인터넷을 점령했다. ‘동물원 폐쇄’
나라 안의 나라
13세기 원나라가 약해지자 하북과 강남 일대에서 도적이 크게 발호했다. 유행하던 백련교를 바탕으로 일어난 도적들은 ‘황색(황제의 색)은 적색이 이긴다’며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다. 홍건적(紅巾賊)이다. 개중 우두머리 서수휘란 자는 황제를 참칭했다. 마음껏 욕심을 채우겠다며 기수를 도읍으로 삼아 ‘천완국’이란 나라를 세웠다. 치평(治平)이라는 제법 그럴듯한 연호도 정했다. 기존의 국법이 통하지 않는, 도적들이 세운 ‘나라 안의 나라’였다.21세기 한국에도 천완국과 비슷해 보이는 곳이 있다. 사법부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