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보도 자제' 너머서 발견한, 마지막 신호 안 놓치는 기술

[지역 속으로] 다큐 '마지막 신호를 놓치지 않는 기술' 취재기
홍수현 제주MBC 보도국 취재부 기자

6월30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홍수현 제주MBC 기자가 핀란드 국립보건복지연구소(THL) 피토 파트로넨 교수를 인터뷰하고 있다. /홍수현 제공

기자들에게 자살 사건은 늘 조심스럽고 거북한 영역이다. 한국기자협회와 보건복지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 제정한 ‘자살예방 보도준칙 4.0’에 따라 구체적인 자살 수법이나 동기, 장소에 대한 보도를 엄격히 자제하는 것은 2차 피해와 모방 위험 등을 막기 위해 기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철칙이자 윤리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그중에서도 전국 최상위권의 압도적 자살률이라는 참담한 지표를 수년째 안고 있는 제주에서, 매일같이 들려오는 소리 없는 비극을 접하며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한 가지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우리가 ‘모방 위험’과 ‘보도 자제’라는 명분 뒤에 안주하며, 정작 자살이 발생하는 구조적·사회학적 원인과 안전망의 공백마저 취재 목록에서 스스로 지워버린 것은 아닐까?”


자살은 결코 개인의 나약함이나 우발적인 불행이 아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적 고립, 경제적 위기, 그리고 구멍 뚫린 보건 복지 체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하는 ‘사회적 재난’이다. 그러나 그동안의 행정 대책은 ‘생명존중’이라는 모호한 구호나 불특정 다수를 향한 캠페인에 머물러 있었다. 정작 죽음의 문턱에 선 이들이 보내는 절박한 위기 신호는 파편화된 데이터와 무관심 속에서 사각지대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침묵의 관성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극적인 사건 보도를 철저히 배제하되, 자살 문제를 냉철한 사회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예방 선진국들은 과연 이 비극에 어떻게 시스템으로 대응해 왔는지 그 실천적인 해법을 찾고 싶었다. 제주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마지막 신호를 놓치지 않는 기술>은 그렇게 시작됐다.

지난 7월3일 홍수현 기자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덴마크 자살유족지원네트워크(NEFOS)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홍수현 제공

◇데이터와 사람, 그리고 수단 통제
과거 인구 대비 자살률이 일본 내 최고 수준이었으나, 치밀한 민관 협업 게이트키퍼(생명지킴이) 시스템을 구축해 자살률을 비약적으로 낮춘 아키타현을 밀착 취재했다. 또 심리부검 전수조사 등을 통해 자살 고위험군과 사각지대를 표적화하고, 유가족을 위한 자조 모임을 연계하는 북유럽과 사회적 처방의 영국 모델을 취재했다.


그곳에서 목격한 예방 선진국들의 핵심 동력은 세 가지다. 첫째, 파편화된 의료·사회 데이터를 하나로 묶어 당장 도움이 절실한 고위험군을 선제적으로 찾아내는 ‘과학적 정밀성’이다. 둘째, 치명적인 약물의 포장 단위를 법으로 제한하고 고위험 장소의 접근을 물리적으로 차단하는 등의 ‘실질적 수단 통제’다. 셋째, 위기 당사자가 고립되지 않고 지역사회 안에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돕는 ‘대화와 사후 돌봄의 안전망’이다. 물론 이들 나라 역시 여전히 안주하지 않고 노력 중이다.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이 우리나라의 절반 이하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한 몇 년 반짝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들의 모습에서 발견했다.

지난 6월30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핀란드 국립보건복지연구소 피토 파트로넨 교수 인터뷰를 마친 뒤 함께 찍은 기념 사진. 왼쪽부터 홍수현 기자, 피토 파트로넨 교수, 김현명 영상취재기자. /홍수현 제공

취재 과정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해외 행정 기관과 연구진, 유가족 단체들을 설득해 깊이 있는 인터뷰를 끌어내고 데이터를 검증하는 과정은 고된 작업의 연속이었다. 또한 자살이라는 중차대한 주제를 시청자들에게 직관적이면서도 가슴 깊이 전달하기 위한 구성과 내레이션 섭외는 특히나 어려웠다. 무거운 주제임에도 선뜻 섭외 제안을 승낙한 류승룡 배우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제주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타이틀. /제주MBC 제공

◇절박한 신호를 기다리는 이웃을 향해
“기사의 진정한 가치는 방송이 나간 뒤,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가에 달려 있다.” 이번 취재는 소중한 경험을 안겨줬다. 다큐멘터리와 연속 기획보도가 나간 후, 오랫동안 굳어져 있던 제주의 행정 현장에 실질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취재 과정에서 다리가 되었던 일본 아키타현청과의 지속적인 실무 소통을 바탕으로, 제주특별자치도와 일본 아키타현 간의 ‘자살예방·생명존중 업무협약(MOU) 추진’이라는 물꼬를 틔웠다. 또한 위성곤 제주도지사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자살예방 정책을 도정의 최우선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로 추진하겠다고 선언했고, 도청 내 전담 행정 조직인 ‘자살예방팀’ 신설이 추진되고 있다. 제주도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도 보도 내용이 핵심 질의 자료로 인용되며 관련 예산 확충으로 이어졌다.

홍수현 제주MBC 기자.

자살은 한 사람의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 사람을 홀로 방치했을 때 발생하는 구조적 재난이다. 언론이 자극적인 사건 보도를 엄격히 경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비극을 예방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검증하고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는 결코 주저함이나 타협이 없어야 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삶과 죽음의 가파른 경계에서 우리 사회를 향해 조용히, 그러나 절박하게 ‘마지막 신호’를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 그 절박한 신호를 놓치지 않고 따뜻한 삶의 끈으로 연결해 주는 정밀한 안전망을 만드는 일, 그것이 언론이 끝까지 펜을 놓지 않고 감시하고 기록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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