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8일 발행된 한국일보 2·3면 하단에는 이름이 빼곡히 실렸다. ‘기사에 도움 주신 분들’이라는 문구와 함께 170명의 실명이 공개됐다. 어떤 기사이길래 이렇게 많은 취재원이 있는지 궁금했다. 찾아보니 <중국 과학굴기 해부-2026 차이나 리포트> 기획이었다. 기획 시리즈 첫 회는 로봇 공학자를 꿈꾸던 열일곱 한국의 과학 인재가 서울대나 카이스트, 미국 공대에 지원하지 않고 중국 칭화대에 진학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6~7월 한 달간 이어진 이 기획 시리즈는 한국일보 특별취재팀(신은별·나광현·이유진 기자, 이혜미 베이징 특파원, 김희서·소민교 인턴기자)이 4월과 5월에 20일간 ‘하늘에서 드론이 음식을 배달하고, 로봇이 커피를 서빙하고, 로보택시가 도로를 누비는’ 모습이 일상인 중국 광둥성 선전 현지를 취재한 결과물이었다. 취재팀을 이끈 신은별 기자는 14일 기자협회보와 만나 “선전은 중국의 첨단기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쇼룸’이었다”면서 “왜 선전에서 이런 혁신이 일어나는지 알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2번 엎어진 끝에 선전 취재 확정
<2026 차이나 리포트> 기획은 처음에 ‘이공계’라는 키워드만 있었다. ‘이공계를 다뤄보면 어떨까’라는 강철원 편집국장의 제안을 받고 사전 취재에 들어갔다. 신 기자가 팀장인 엑설런스팀은 올해부터 편집국장 직속으로 개편됐다. 신 기자는 팀원들과 함께 이공계 관련 포럼이 있으면 찾아가고, 전화를 돌리고, 책도 사서 보면서 공부했다. 이공계 위기는 언론에서 많이 다룬 아이템이라 새롭고 의미 있는 걸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템 주제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공계 인재를 누룽지처럼 긁어서 써보자’는 취지로 취재하다가 거기서 파생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러면서 주제가 중간에 2번이나 바뀌었다. 기획 주제가 바뀌어 막막했지만, 그런 시간도 공부의 연장이었다. 그렇다고 준비할 여유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기획 준비는 다른 아이템을 취재하면서 하는 가욋일이었다. 방향이 잡힌 건 3월 중순쯤. 한국일보 경영진의 중국 선전 출장을 계기로 선전에 대해 알게 됐고 선전에 대해 추가로 공부하니 “선전이라는 쇼룸을 통해 중국 이공계를 포함한 과학기술 전반을 다룰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선전을 중심으로 광저우와 홍콩을 취재했다.
“선전은 수십 년 만에 중국의 대표적 혁신도시로 변한 곳이더군요. 화웨이, 텐센트, BYD, DJI 등 첨단기업의 본거지가 됐고요. 외국인들이 기술 관광을 오는 선전을 통해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상을 취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 기자는 4월 홍콩으로 입국해 도시철도를 타고 선전에 들어갔다. 광저우를 거쳐 선전에 들어온 나광현 기자와 함께 2주 넘게 체류하며 선전의 기술 현장을 기록했다.
◇12회 기획 시리즈 13만자 분량
취재 계획을 최대한 짜서 갔는데, 일정이 계속 생겨났다. “취재 과정에서 사람이나 기관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녹이고 싶어 일정을 많이 소화했죠. 취재의 50%는 현장에서 잡힌 일정이었어요.” 선전에서 3시간40분 고속철도를 타고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이 태어난 광둥성 찬장시 우촨의 미리링 마을을 찾고, 선전의 테크 네트워킹 행사 현장도 일부러 취재했다.
애초 5회로 잡은 기획 시리즈는 12회로 늘어났다. “취재량이 100이라고 하면 기사로 쓴 건 10도 안 된다”고 했지만, 분량은 초안 기준 13만자, A4용지 기준으로 105페이지에 달했다. 기획의 반향은 컸다. 가장 직접적인 변화는 독자의 장기 기부로 이어졌다. 익명의 독자는 한국의 과학 인재가 중국 칭화대로 발길을 돌리는 현실을 다룬 시리즈 첫 회를 보고 경각심을 갖던 중 서울대 공과대학이 중국 과학기술 패권에 맞서 ‘추격 연구단체’를 설립했다는 한국일보 보도를 보고 매년 1억원을 서울대 공대에 기부하기로 했다. 신 기자는 서울대를 출입하는 남병진 기자가 쓴 기사를 보고 기부 사실을 알았다며 웃었다. “놀랐어요. 기자들이 영향력 있는 기사를 쓰려고 노력하잖아요. 누군가 우리 기사를 보고 후원했다는 걸 알고 팀원들끼리 신기하다고 얘기했어요. 뿌듯했죠.”
이 기획은 <제2차 차이나쇼크>라는 단행본으로도 출간된다. 신 기자가 출판사 몇 곳에 제안했는데, 출판사 생각의힘에서 흔쾌히 받아들였다. 270페이지 분량의 책은 <2026 차이나 리포트> 기획 그대로 들어가되 일부 보강하거나 업데이트했다. 11월18~19일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맞춰 11월 초 출간 예정이다.
신은별 기자의 기술혁신 현장 취재는 선전으로 끝나지 않았다. 7월에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TSMC를 중심으로 한 대만의 반도체 산업을 취재해 <2026 타이완 리포트-반도체 강국의 명암>(신은별·나광현·문지수 기자, 김희서 인턴기자)을 8월10일부터 27일까지 7차례 보도했고, 8월 말에는 홍콩투자청이 한국의 기술기업 12곳 관계자들을 홍콩으로 초청한 행사에 동행해 홍콩과학단지, 홍콩-선전 혁신기술단지(HSITP) 등을 둘러봤다. “올해 취재 수첩은 중국·홍콩과 대만의 기술 현장에서 기록한 메모로 가득했다”고 표현한 취재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중국과 대만, 홍콩 모두 절박한 이유가 있었어요. 자립과 안보, 생존이라는 절박함이 첨단기술을 키우는 동력이었던 거죠. 우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일주일 단위로 기획 기사 생산
“엑설런스팀? 뭐 하는 팀이에요?” 명함을 건네면 으레 따라오는 질문이다. 기획취재와 탐사보도를 하는 팀인데, 익숙하지 않아 묻는 말이다. 신 기자는 유럽 특파원을 마치고 귀임한 지난해 6월부터 엑설런스팀에서 일하고 있다. 올해 편집국장 직속 조직으로 개편된 팀은 일주일 단위로 기획 기사를 생산한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같은 큰 이슈가 발생하면 그에 맞는 기획도 따로 한다. “발행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주간지 기자라 할까요? 일주일에 한 번씩 출입처가 바뀐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데일리 기사를 쓰는 기자들보다 시간을 많이 주는 만큼 뭔가 다른 걸 써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요 보도를 소개해달라고 하자 정치인 출판기념회 고발 및 후속 기사를 가장 먼저 꼽았다. 1월 신 기자는 나광현·이유진 기자와 함께 6·3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하는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를 돌아다니며 ‘노골적 수금 창구’로 전락한 출판기념회를 고발했다. 두 달 후엔 출판기념회 단속 현황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해 불법·편법 출판기념회에 무관심한 중앙선관위를 비판했다. “팀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출판기념회를 찾았습니다. 시장 후보 출판기념회에 현직 시·구의원들이 현장 관리를 맡고, 구의원 와이프까지 오는 걸 조목조목 짚었어요. 출판기념회 시즌이 끝나고 선관위가 대응을 잘했는지 취재해 2탄을 썼거든요. 그런데도 바뀌지 않더군요.”
지난 겨울엔 서울 독산역 인근 주택가를 돌며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뒤졌다. 서울 금천구 생활폐기물을 위탁 처리하던 충남 공주·서산시 중간재활용업체가 ‘종량제 봉투 내 음식물 혼입 적발’을 이유로 충남도청에서 행정처분을 받았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종량제 봉투를 손으로 만지며 음식물을 확인하던 나광현 기자는 “선배, 이건 먹다 남은 떡볶이 같습니다”라고 했다. 수도권 생활폐기물 직매립 금지 이후 지방 원정 소각에 대한 문제점을 다룬 기사는 ‘민폐수도 서울’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기사를 쓰다 보면 누군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예전에 그런 일이 생기면 혼자 안고 끙끙댔는데, 지금은 팀원들과 이야기하며 고민을 나눈다. “팀원들이 있어서 그런 부분들이 되게 도움이 되거든요. 내 생각이 상식에 어긋나거나 과몰입한 상태일 수 있는데, 우리끼리 체크를 하거든요. 상호 검증 차원에서….” 유럽에서 혼자 지내다 돌아와 걱정이 많은 그에게 팀원들은 기댈 언덕이 됐다.
◇삼성전자 다니다 한국일보 입사
신 기자는 한국일보 입사 전에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서 3년 넘게 있었다. 해외 영업부에서 일하던 그는 2015년 초 기자 시험을 준비했다. 학교 다닐 때 장래 희망으로 기자를 적을 정도로 기자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미학과에 다녔는데 기자 시험을 보려고 언론정보학과 수업도 몇 개 들었거든요.” 정말 도전만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그해 열리는 시험에 응시하고 안 되면 말자는 생각이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언론사 입사 준비 아카데미에 등록해 벼락치기로 공부했다. 오후 5시쯤 퇴근해 신촌에 있는 문화센터로 가서 수업을 듣고, 주말엔 스터디에 나갔다. 처음으로 붙은 곳이 한국일보였고, 2015년 9월 입사했다. 조금 더 주도적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대단하게 어떤 정의감을 갖고 회사를 때려치운 건 아니었어요(웃음).”
“후회하지 않으세요?” 한국일보 입사 당시 들었던 이 말을 최근 부쩍 많이 듣고 있다. 인공지능(AI) 메모리 호황으로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직원들이 수억원대 성과급을 받게 됐다는 소식이 퍼지면서다. “후회라면 후회할 수도 있겠는데 기자를 하며 채워온 게 더 많은 것 같아서 그냥 합리화하기로 했습니다(웃음).”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얘기했다.
그는 6개월 수습을 마치고 문화부에서 미술과 문화재 출입을 하며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사회부와 정치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9년 하반기부터 약 2년 청와대를 출입했고, 2021년 10월 한국일보 유럽 특파원으로 선발됐다. “미국 실리콘밸리 특파원 공모에 참여해 고배를 마셨지만 굴하지 않고” 다시 도전해 선발됐다.
2022년 6월 독일 베를린에 부임하고 한 달도 안 돼 러시아가 침공한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들어갔다. 키이우 인근 도시 이르핀과 호스토멜에서 러시아의 공습으로 학교가 통째로 무너진 현장을 목격했고, 하늘을 찢는 미사일 굉음을 듣기도 했다. 러시아군이 쏜 미사일이 키이우의 민간인 아파트에 떨어진 현장으로 향하면서 위험을 실감했다. ‘키이우라고 안전한 게 아니구나.’ 아무래도 중요한 정보를 누군가한테 알려야 할 것 같았다. 가는 길에 남동생에게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쓸모없는 기사 더하지 않으려 노력”
2023년 2월 튀르키예와 시리아 대지진 때는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700km를 차로 쉬지 않고 달려 10시간 만에 피해 현장에 도착했고, 2024년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1년을 맞아 이스라엘 현지 취재를 하다가 공습경보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귀한 경험을 최대한 많이 기사로 풀어내기 위해 좀 더 많이 돌아다니고 들으려고 노력했다. 전쟁과 자연재해의 참혹한 현장에서 ‘대체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하나’라는 고민에 자신을 완전히 가둘 때도 있었다.
유럽 특파원은 경험하기 어려운 사안을 취재하는 기회였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과 콘클라베(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 비밀회의) 취재는 인상적이었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밤새 개방해서 조문을 받는 장면, 바티칸 밖 골목까지 조문객이 장사진을 이루는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시 유흥식 추기경이 현지에 파견된 기자들과 만나 콘클라베의 뒷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바티칸 내부 장소에 데려가 주셔서 구경했는데, 이 모든 것들이 다 기자여서 할 수 있는 경험이잖아요. ‘정말 운이 좋구나’ 생각했어요.”
유럽 특파원(2022년 6월~2025년 5월)으로 3년간 독일에서 일하면서 무엇을 배웠을까. “취재가 늘 잘 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미리 안 된다고 생각할 것 없다.” 그는 주도적으로 취재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고 했다. 올해로 11년 차. 그는 기자 페이지에 “뉴스가 넘치는 세상에 쓸모없는 기사를 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썼다. 어떤 기자로 남고 싶냐는 질문에 “이것만 잘 지켜도 다행인 것 같다”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