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3일 텔레그램을 통해 국내에 마약을 유통한 혐의를 받는 ‘마약왕’ 박왕열이 송환되던 날, 인천국제공항에는 수많은 취재진이 몰렸다. 전날 취재원과 늦은 시각까지 술잔을 기울였던 최광일 JTBC 기자 역시 현장을 찾았다. 문득 자신을 기억할지 궁금해진 그는 남은 술기운을 빌려 박왕열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에요.”
‘사탕수수밭 살인 사건 피해자나 유족에게 할 말 없나’, ‘필리핀 교도소에서 호화 생활을 했나’, ‘국내로 송환된 심경이 어떤가’ 등 취재진의 질문에 묵묵부답이던 박왕열은 최 기자를 발견하자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러고는 최 기자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한 마디를 던졌다. “넌 남자도 아녀.”
최광일 기자는 2023년 필리핀 교도소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한국에 마약을 유통하던 박왕열을 단독 인터뷰했다. 이후 후속 보도를 통해 23일 이달의 기자상을 받은 최 기자가 처음 마약 문제에 관심을 둔 것은 20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탐사보도 프로그램 PD 시절 <황하나와 신세계> 편을 제작하며 마약 범죄의 이면을 취재할 때였다. 그가 만난 취재원 중 세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약 투약 중 겪는 환각과 자살 충동이 원인이었다. 또 다른 취재원은 “30년째 마약을 참고 있다”고 했다. 마약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실감했다.
그러던 중 뉴스에서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2016년 필리핀 사탕수수밭에서 한국인 3명을 살해한 혐의로 수감 중인 박왕열이 교도소 안에서 한국에 마약을 유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외 교도소라는 특수성 때문에 경찰 수사에도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다. “언론이 오히려 상황 파악에 유리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최 기자는 무작정 필리핀으로 떠났다.
취재는 순탄하지 않았다. 방탄조끼까지 챙겨입고 필리핀 전역의 교도소 8곳을 돌았지만, 그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필리핀 정부의 촬영 협조를 받지 못한 채 카메라를 숨겨 교도소 내부를 촬영했던 탓에 쓸 만한 영상도 없었다. 유일한 수확은 박왕열의 동료 수감자들과 안면을 튼 것 뿐이었다.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한국에 돌아온 직후 필리핀 법무부에 공식 촬영 협조를 구했다. 수차례 공문을 보낸 끝에 5개월 만에 허가를 받아냈다. 이틀 뒤, 최 기자는 촬영기자와 함께 다시 필리핀으로 떠났다. 마침내 페도라와 선글라스 차림의 박왕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 기자는 “동료 수감자들을 인터뷰했다는 소식에 박왕열이 호기심을 느껴 면회에 응한 것 같다”며 “카메라가 교도소 안까지 들어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듯했다”고 말했다.
취재를 무사히 끝냈지만 고민은 여전히 남았다. 취재원인 박왕열의 동의를 받지 않은 상황이었다. 인터뷰를 내보내도 될지, 보도 여부를 판단해야 했다. 박왕열은 면회 도중 “방송에서 떠드는 놈들은 조선족을 보내 없애버리겠다”며 최 기자를 압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고민을 거듭할수록 보도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제가 취재원으로 만난 사람들이 마약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어요. 그런데 막상 그 마약을 유통한 사람에게는 교도소가 보호막이 되더라고요. ‘나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는 태도를 보니 박왕열이 반드시 한국으로 송환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보도가 나간 직후 보복 위협은 현실이 됐다. 박왕열의 동료 수감자들로부터 연락이 쏟아졌고, 첫 취재를 함께했던 오혁진 일요시사 기자는 살해 협박을 받았다. 최 기자 역시 3개월간 경찰에게 신변 보호를 받아야 했다. “종종 아파트 계단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무서울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땐 엘리베이터를 타도 일부러 두 개 층 아래에서 내려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도 했죠.”
박왕열이 국내로 송환됐지만, 여전히 우려는 남는다. 이번 송환은 수사와 재판을 목적으로 한 ‘임시 송환’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형을 살게 하려면 필리핀에서 선고받은 60년형보다 무거운 형을 받아야 하지만, 국내 마약 범죄 양형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박왕열은 대대적인 보도가 나간 2023년 이후에도 마약 유통을 멈추지 않았다. 최 기자는 “개인적인 보복보다도, 그가 필리핀으로 돌아간다면 한국으로 다시 마약을 유통할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무섭다”고 했다.
3년에 걸친 끈질긴 보도로 생애 첫 이달의 기자상을 받은 최 기자는 공을 ‘운’으로 돌렸다. 그는 “박왕열을 만난 것도, 그가 저를 알아본 것도 천운이라 생각한다”며 “그 덕에 처음에는 관심을 받지 못하던 이 보도가 주목받을 수 있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는 끝으로 지난해 제작한 이태원 참사 3주기 다큐멘터리 ‘별들에게’에 대한 관심도 덧붙였다. “가수 하림씨와 함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작품인데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비긴 어게인’ 감성으로 제작했으니 한 번씩 봐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