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성과를 경제로 전환하려면

[이슈 인사이드 | 경제] 오찬종 매일경제신문 기자

부산과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가 ‘경주선언’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번 회의는 국민들에게도 여러 장면이 회자될 만큼 외교의 축제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국빈 방한을 환영하며 악수를 나누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6년 4개월 만에 부산 김해공군기지에서 마주 앉았다. 두 정상은 희토류 수출 통제 유예, 펜타닐 관련 관세 인하, 미국산 농산물 수입 재개 등을 골자로 한 휴전에 합의했다.


핵심 쟁점이 여전히 미결 상태라는 점에서 일시적 봉합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세계 1·2위 경제대국을 한자리에 앉힌 무대를 한국이 제공했다는 사실은 분명 의미가 크다. 이는 우리의 외교적 위상이 '조력자'에서 '조정자'로 격상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 시진핑 주석,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각각 양자 회담을 갖고 실질적인 외교 성과도 거뒀다. 대미 관세 협상 타결로 자동차·조선업계에 숨통이 트였고, 핵추진 잠수함(핵잠) 도입 논의에서도 진전이 있었다. 중국과는 70조원 규모의 통화스와프 체결, 고위급 소통 채널 재가동, 한한령 해제, 한화오션 제재 문제 등 민감한 사안까지 다뤘다. 일본과는 셔틀외교 복원에 합의하며 양국 관계 회복의 계기를 마련했다.


정상 외교 무대의 이면에서는 또 하나의 전략적 ‘빅딜’이 이뤄졌다. 세계 최대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가 한국 정부와 삼성, SK, 현대차, 네이버클라우드 등 4대 그룹에 GPU 26만 개를 우선 공급하기로 한 것이다. 기존 보유량 3만여 개를 포함하면 총 30만 개에 달하며, 이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규모다.


젠슨 황 CEO는 APEC CEO 서밋 특별 세션에서 이 계획을 직접 발표했고, 이재용·정의선 회장과는 강남의 치킨집에서 ‘AI 깐부 회동’을 가져 국내외 주목을 받았다. 이번 협력은 단순한 제품 공급을 넘어, 엔비디아의 플랫폼을 바탕으로 AI 팩토리를 구축하는 ‘플랫폼 동맹’이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한국은 이제 AI 기술 주권을 향한 분기점에 서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10월31일 APEC 정상회의 장소인 경북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접견에 앞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해진 네이버 의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이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대통령실 제공

하지만 선언과 합의는 어디까지나 출발선일 뿐이다. 관세 협상, 핵잠 추진, 엔비디아와의 AI 협력 모두 상대국과 기업의 입장 변화에 따라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이제는 외교의 무대에서 내려와 실용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엔비디아 협력이 선언에 그치지 않도록 하려면 정치권이 AI 관련 10조원 규모 예산과 혁신펀드를 신속히 검토하고 통과시켜야 한다. 산업구조 개혁과 규제 혁신 역시 속도를 내야 한다.


국내 기업 환경은 여전히 경쟁국 대비 열악하다. 올 상반기 해외로 이전한 기업은 2437곳에 이르지만, 국내로 복귀한 유턴 기업은 5곳에 불과하다. 기업이 머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면, 어렵게 얻은 외교적 성과는 금세 시들어버릴 수밖에 없다.

오찬종 매일경제신문 기자.

이번 경주선언에 세계무역기구(WTO) 지지 문구가 빠진 것은, 자유무역이라는 대원칙조차도 각국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APEC 정상회의가 막을 내리면서 외교의 시간은 끝났다. 앞으로는 이 외교적 토대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경제 성과를 얼마나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국정 운영의 성패가 결정될 것이다. 외교의 조명이 꺼진 지금, 실용의 시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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