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근로자 4명 중 3명 직장내 괴롭힘… "'오요안나법' 제정을"

17일 국회의원회관서 '오요안나법의 조건은 무엇인가' 토론회
"고용형태 불문 일하는 모든 사람에 괴롬힘 금지법 적용해야"

MBC 기상캐스터 오요안나씨가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다 숨진 지 10개월이 지났지만 방송 미디어 현장에선 여전히 직장 내 괴롭힘이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다. 17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오요안나법의 조건은 무엇인가’ 토론회에선 반말, 폭언, 각종 부당한 지시 등 방송 현장의 괴롭힘이 특정 직군을 가리지 않고 산업 곳곳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며 조속한 대책과 재발방지책이 필요하다는 주문이 나왔다.

토론회에 참석한 고 오요안나씨의 모친 장연미씨는 “우리 안나가 죽기 전 자기가 불이익 당한 것들을 다 정리해놓았다”며 “오늘 자리가 사각지대에 있는 비정규직이 얼마나 고통 받고 소외 받고 있는지 함께 토론하고 법제화시키고 현실화시키는 과정이 됐으면 한다. 오늘 실질적인 토론을 통해 법이 상정되고 통과가 된다면 정말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17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오요안나법의 조건은 무엇인가’ 토론회에 고 오요안나 MBC 기상캐스터의 모친 장연미씨가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강아영 기자

이날 토론회에선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에서 3월에 실시한 ‘방송 비정규직 긴급 설문조사’와 6월에 실시한 ‘방송 미디어 현장 직장 내 괴롭힘 사례 조사’ 결과가 공개됐다. 각각 396명과 50명이 참여한 해당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 4명 중 3명은 △폭행·폭언 △모욕·명예훼손 △따돌림·차별 △업무 외 강요 △부당 지시 중 하나라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 해당 경험이 어느 수준으로 심각했는지 물음에 ‘심각한 편이다’(44.6%), ‘매우 심각하다’(14.4%)는 답변이 과반에 달했다.

진재연 엔딩크레딧 집행위원장은 “이는 조사에 참여한 방송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경험한 직장 내 괴롭힘 수준이 피해 당사자에게 쉽게 넘기기 어려운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며 “괴롭힘으로 인해 자해와 같은 극단적 선택을 고민한 적이 있는지 물음에도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이 25.2%로 적지 않았다. 또 괴롭힘으로 인한 영향을 묻는 질문에 ‘살인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는 기타 응답이 있었는데, 정신적 고통이 폭력적인 연쇄 작용으로 이어지지 않을지 염려됐다”고 말했다.

"근로자만 적용되는 직내괴 규정… 수많은 프리랜서·특고 노동자 방치"

토론회에선 현장 증언도 나왔다. 6개월간 머니투데이 프리랜서 에디터로 일했던 허이슬(가명)씨는 “글을 쓰고 싶어 지원했지만 실제 한 일은 글 쓰는 일이 아니라 홍보 상품을 판매하는 영업사원이었고, 계약을 체결한 상대방도 머니투데이 본사가 아니었다”며 “팀장은 매출을 잘 내면 1년 뒤 본사 정직원인 특채 기자로 채용될 수 있다며 저를 설득했고, 회사 이름도 쓰여 있지 않은 용역계약서에 일방적으로 사인하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프리랜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저에겐 단 하나의 자율성도 보장되지 않았고 6개월간 거의 무급으로 착취당했다”고 말했다.

허씨는 “매일 아침 9시30분까지 출근했고 재택근무일에도 10분 내로 업무 회신을 해야 했으며 무급 야근과 주말 근무도 강요당했다. 성희롱과 직장 내 괴롭힘도 당했다”며 “더 이상 이런 노동 착취를 당할 수 없어 퇴사했고 용기를 내어 노동청에 진정을 넣었지만 5인 미만 사업장,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혐의없음’이란 결론이 나왔다. 계약서 한 장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재단하지 말아 주시길, 기업들이 꼼수를 부리더라도 노동청과 근로복지공단, 국가에서 제대로 실질을 들여다봐주길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17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오요안나법의 조건은 무엇인가’ 토론회가 열렸다. /강아영 기자

증언자들은 특히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게만 적용되는 직장 내 괴롭힘 규정이 수많은 프리랜서,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방치하고 있다며 일명 ‘오요안나법’이 통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씨의 경우 고용노동부가 직장 내 괴롭힘은 인정했지만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관련 규정을 적용할 수 없다는 판단을 5월 말 내린 바 있다.

"직내괴 가해자가 증명… 프리랜서 기본소득 보장도 필요"

김유경 노무법인 돌꽃 노무사는 “22대 국회가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100여개고, 이 가운데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관련 내용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개정안은 7일 기준 13개”라며 “대부분 ‘고용 형태를 불문하고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적용돼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는 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 법률은 반드시 제정 또는 개정돼야 할 것이다. 다만 법제화 이전이라도 각 조직에서 조직 문화를 상시 점검하고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은성 샛별노무사사무소 노무사도 “고용 형태를 구분하지 않고 직장 내 괴롭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입법 방향에 동의한다”며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범위 확대와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적용 범위 확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가야 하는 의제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판단 기준 정비를 통해 노동자 오분류 문제 해결이 선행돼야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적용 범위 확대 논의가 탄력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17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오요안나법의 조건은 무엇인가’ 토론회가 열렸다. /강아영 기자

이날 토론회에서 오씨의 삼촌 장영재씨는 프리랜서의 기본 소득 보장과 직장 내 괴롭힘 증명 책임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전환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장씨는 “죽은 오요안나가 근로자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나. 피해자가 증명하는 제도가 아니라 가해자가 증명하는 제도를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며 “오요안나가 월 130만원을 받고 의상비로 100만원을 지출했으니 30만원을 받은 셈이다. 근로기준법이 인간의 최소 기본권을 보장하는 법인만큼 프리랜서도 기본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그런 제도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토론자로 참석한 최충운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기획관 서기관은 “마음이 무겁다”며 “근로감독관들이 좀 더 역할을 잘 했으면 과연 이런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부터라도 최대한 내실 있는 근로 감독과 현장 지도를 통해 현장을 바꿔나가고 법·제도 개선 노력을 함께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다만 오씨의 근로감독 결과가 모순적이라는 지적에 대해선 “책임감을 가지고 저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사실관계를 파악했다”며 “객관적으로 잘 평가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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