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간40분만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향하는 베이스캠프(EBC)인 해발 5364m에서 출발해 해발 3440m에 위치한 셰르파들의 마을인 남체바자르까지 달려 내려가는 길. 5월29일 정병선 조선일보 기자가 ‘네팔 에베레스트 마라톤 대회’ 42.195km 풀코스를 완주한 기록이다.
이날 저녁 7시40분, 그는 남체 마을 입구의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참가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마라톤 조직위 사람들이 정 기자를 안아주고 환영했다. “너무 행복했지….” 그는 피니시 라인에 다다랐던 순간을 떠올렸다.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딸 때 이런 기분 아니었을까 싶었어요.(웃음) 물론 1등은 아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완주 메달과 기록증, 조직위가 준비한 태극기까지 받고 나니 아 이제 끝났구나 싶었어요.”
에베레스트 마라톤은 세계 극지·험지 마라톤 중 하나다. 매년 5월 세계 각지에서 200여명의 참가자들이 모인다. 고산병 위험이 크고 극도의 피로와 고통을 이겨내야 하기에 사전에 타 마라톤 대회 완주 기록, 의사 소견서 등을 내야 하고, 네팔 정부가 이를 철저히 검증한 뒤에야 출전 자격이 주어진다.
마지막 10km 구간은 그야말로 죽음의 레이스였다. 내리막만 있는 게 아니라 2km 정도는 올라가야 한다. 모든 구간마다 평탄한 길은 거의 없었다. 자갈밭, 돌밭이 대부분이라 잘못하면 발목을 삐거나 사고를 당할 수 있다. “다치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속도를 줄여서라도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오직 완주라는 목표로 달렸다. 오후 4시 컷오프 구간이 있어 마냥 지체할 수도 없었다. 역대 에베레스트 마라톤 한국인 참가자는 20여명. 이 중 완주한 사람은 9명뿐이었다. 정 기자는 역대 한국인 완주자 중 7등을 기록했다.
“이미 우리나라 산에서 50km 완주를 해봤는데, 이건 42.195km니까 절반만 넘으면 쉽게 가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가도 가도 끝이 없더라고요. 우리나라 지형을 딛고 뛰는 것과 차원이 달라요, 그 산의 기세가…. 그만큼 거칠고 험난한 산이라서 발의 부담이 몇 배는 되더라고요.”
정 기자의 생애 첫 마라톤은 서울대 재학 시절 학교에서 열린 ‘4·19 마라톤’이었다. 준비도 없이 나간 10km 코스, 결과는 놀라웠다. 체대 학생들이 1등부터 10등까지 싹쓸이하던 시절, 비체대생으로 유일하게 9등을 했다. 사실 그는 ‘달리기 DNA’를 타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누나는 대한민국 최초로 자매가 육상 국가대표를 지낸 정순남·정순화씨다. 4·19 마라톤 이후 달리기는 잊고 지내다 2017년 강원도에서 열린 산악 마라톤 대회를 통해 트레일 러닝의 매력을 처음 알게 됐다. 원래는 10km에 도전하려 했지만, 현장에서 무작정 50km 코스에 뛰어들었고, 완주했다.
그러다 지난해 에베레스트 마라톤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1999년 사회부 기자 때 취재원으로 처음 만난 후 히말라야를 10번 이상 함께 갔다 오는 등 인연이 깊은 엄홍길 대장과의 대화 중에 “고난도의 마라톤이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순간 “기자 인생에서 기록 하나는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준비 과정으로 4월 조선일보 마라톤 하프, 5월 강릉 노스페이스 트레일 러닝 50km를 완주했다. 한 달 새 국내외에서 3차례 마라톤을 완주한 셈이다.
도전 끝 나눔도 의미를 더했다. 완주 소식을 주변에 알리면서 ‘1만 원 기부 챌린지’를 제안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다. 6월27일 정 기자는 엄홍길휴먼재단에 에베레스트 마라톤 완주를 기념해 네팔 청소년을 위한 기부금 500만원을 전달했다.
험한 환경에 끌리는 건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3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하며 분쟁 지역, 오지, 극한의 현장에 주로 다녔다. 체첸 내전 취재만 세 차례, 코소보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조지아-오세티야 분쟁, 아프리카 대홍수 등의 현장에 다녔다. 후배들에겐 그래서 ‘국민 소득 1000불 미만 전문 기자’ ‘분쟁·오지 전문 기자’ 등으로 불렸다.
그의 다음 목표는 여전히 ‘극한’이다. 또 다른 세계 오지 마라톤인 고비사막 마라톤, 남극 마라톤처럼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마라톤에 도전하고 싶다는 게 그의 계획이다. “보스턴, 런던, 뉴욕 같은 도시 마라톤보다는 거칠고 낯선 환경이 더 끌려요. 일할 때도 남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취재하는 걸 즐겼던 것 같아요. 기자 생활하면서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