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듣는 줄도 모르고… "노 대통령이 방송 맡아달라 했다"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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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서동구 KBS 사장, 8일 만에 사퇴

서동구 KBS 사장(오른쪽)이 2003년 3월27일 첫 출근하자 노조원들이 막아서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2003년 3월8일 박권상 KBS 사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박 사장은 이날 열린 임시이사회에서 “지난 1월1일 사임을 결심했으나 회사의 큰 행사(KBS 공사 창립 30주년 기념식)를 앞두고 미뤄왔다”면서 “모든 행사를 끝마쳐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사의를 밝혔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1998년 4월 KBS 사장에 취임해 2000년 연임한 박 사장은 임기를 70여일 남겨두고 있었다.


박 사장 퇴임 직전부터 KBS 안팎에선 사장 내정설이 떠돌았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는 그해 3월6일 성명에서 “대선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뛰었던 ‘언론정책 고문’ 출신 서모씨의 내정설이 나온다”고 했다. KBS본부가 지목한 서모씨는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의 언론정책 고문을 맡았던 서동구씨였다. 그는 경향신문 편집국장 출신으로 1980년 검열거부를 주도하다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됐으며 8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KBS본부는 “서모씨가 낙하산을 타고 KBS에 입성하려 한다면 KBS의 정치적 독립을 바라는 전 직원과 함께 끝까지 싸워나갈 것”이라며 KBS 이사회에 ‘공개적이고 투명한 KBS 사장 선임’을 위해 사원대표, 시민단체, 학계 등을 아우르는 사장추천위원회 구성을 요청했다. KBS 이사회는 사장추천위원회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개방형 국민추천제’로 사장을 뽑겠다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KBS본부와 시민사회단체는 ‘개혁적 KBS 사장 선임을 위한 시민사회단체·노동조합 공동추천위원회’(KBS 사장 공동추천위원회)를 구성했다.


KBS 사장 공동추천위원회는 3월19일 시민사회단체와 노조가 추천한 인사들 가운데 심사를 벌여 성유보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 이형모 전 KBS 부사장, 정연주 한겨레 논설주간 등 3명을 KBS 사장 후보로 추천했다. KBS 이사회는 3월22일 이들 3명을 포함해 자천 타천한 후보 46명을 대상으로 심사한 뒤 서동구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사장 후보로 제청했다.

내정설 인사 임명에 출근 저지하며 저항

내정설이 나돌던 인사가 KBS 사장으로 임명 제청되자 노조와 시민사회단체, 언론현업단체의 저항이 격렬했다. “KBS 이사회가 새 사장 자격 요건을 제시한 개혁성, 독립성, 경영능력, 전문성, 인격과 품성 등에도 서씨는 배치되는 인물”(언론노조 KBS본부 성명), “정실인사 비판과 권언유착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언론개혁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서동구씨가 KBS 사장으로 임명돼선 안된다”(KBS 사장 공동추천위원회), “서동구씨는 KBS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켜내기 어렵고 방송에 대한 전문성을 갖췄는지도 의문”(한국기자협회) 등 성명과 기자회견을 통해 내정 철회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3월25일 KBS 이사회가 제청한 대로 서동구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KBS 사장으로 임명했다. 서 사장은 3월27일 첫 출근에 나섰으나 노조의 저지로 무산됐다. 서 사장은 자신을 가로막는 조합원들에게 “언론개혁을 위해 여기에 왔다.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겠다. 대화와 토론을 하자”고 거듭 말했다.


서 사장은 다음 날 청원경찰 100여명을 앞세워 사장실에 출근했다. 조합원들은 주차장 입구에 누워 차량을 가로막았으나 청원경찰이 물리력으로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조합원들은 옷이 찢어지고 찰과상을 입었다. 서 사장은 이날 사내 통신망을 통해 “40년 언론 생활에서 마지막 봉사의 기회다 싶어 오래 망설임과 고민 끝에 이 자리에 왔다”며 “사원 여러분들과 어떤 형식, 어떤 장소도 마다하지 않고 대화하겠다”고 말했다.


서 사장의 대화 요구에 언론노조 KBS본부는 출근 저지를 계속하며 전국 조합원 총회, 파업 찬반 투표 일정을 잡는 등 투쟁 단계를 끌어 올렸다. 서 사장은 사보를 통해 △경직된 관료화, 하향식 의사 결정 △인사 소외·불균형 시정과 책임 인사 전통 확립 △매체 비평과 시사 프로그램 개발 및 활성화 추진 등 KBS 개혁방안을 제시하며 “파업 찬반 투표는 노사 상호간의 상처만 깊게 할 뿐”이라며 “노사 문제는 오직 대화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KBS노조 조합원 800여명은 2003년 3월25일 낮 KBS 본사 앞에서 서동구 사장 임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한국기자협회

서동구 사장, 예고 없이 지명관 이사장 찾아

서 사장은 4월1일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지명관 KBS 이사장이 소장으로 있는 경기도 안양시 한림대 한림과학원 일본학연구소를 예고 없이 찾았다. 지 이사장은 “기왕에 오셨으니 안 만날 수 없다”며 올라오라고 했다. 서 사장은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사무실에서 지 이사장과 20분간 얘기를 나눴다. 어찌 된 일인지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4월2일 조선일보 1면에 “노 대통령이 방송 맡아달라 했다”는 제목으로 자세히 실렸다.


“서동구 사장이 1일 지명관 이사장을 만나 ‘(내가 대통령에게) 조·중·동이 가하고 있는 공세가 대부분 여론을 잘못 끌고 있다면 방송이 왜곡된 여론에 바른 물꼬를 터줘야 개혁의 단초가 잡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노 대통령을 만나 ‘신문 개혁을 돕는 길 아니면 도와줄 수 없다’고 하자, 며칠 후 (노 대통령이) ‘방송 쪽을 맡아달라’고 말했다”는 게 기사 요지였다. KBS 사장 인사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청와대 주장을 서 사장이 뒤엎는 말이었다.


조선일보 보도로 파문이 확산할 조짐을 보이자 서 사장은 이날 오전 전격 사퇴를 표명했다. 그는 사장에서 물러나고 한 달 후인 5월3일 오마이뉴스와 전화 인터뷰에서 사퇴 결심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노조에서 나를 끊임없이 거부하는 명분이 내가 대통령 고문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청와대가 인선에 개입했다는 기사가 터지면 걷잡을 수 없어지지 않겠나? 마침 노조가 다음날 전국 총회를 소집해놓고 파업 찬반 투표까지 불사하는 상황에서 더 큰 불상사를 막기 위해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언론노조 KBS본부 공정보도추진위원회(공추위) 간사로 일했던 김현석 KBS 기자는 조선일보 보도가 서 사장 사퇴에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김 기자는 “그전까지 KBS 이사회가 독자적으로 뽑았다고 주장했는데, (조선일보 보도로) 대통령이 보냈다는 게 명확해지니까 계속 있기 힘들었고, 그나마 염치가 있는 분이라 그만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어떻게 서동구 사장의 발언 내용을 자세히 실을 수 있었을까. 조선일보는 해당 기사에서 “서 사장 임명을 둘러싼 ‘외압 의혹’을 취재하기 위해 경기도 안양시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에 찾아갔으며,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취재했다”고 취재 과정을 밝혔다.


서 사장과 지 이사장이 4월1일 오후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에서 문을 열고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찾아왔다. 지 이사장은 ‘바깥 손님’을 보더니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고 서 사장은 복도를 등지고 앉아 밖에 있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몰랐다. 서 사장이 얘기를 끝내고 나왔을 때 그 손님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손님은 조선일보 기자였다. 조선일보 기자는 활짝 열려 있는 문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 서 전 사장은 5월3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내가 찾아와서 중요한 회사 얘기를 하는데, 조선일보 기자가 왔다는 얘기를 하지도 않고 민감한 질문을 계속 던진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결과적으로 조선 기자가 속기하듯이 대화 내용을 받아쓰게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KBS 사장 선임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보도가 나가고 서 사장이 사의를 밝히자 노 대통령은 자신의 견해를 직접 밝혔다. 마침 그날은 국회에서 노 대통령의 첫 국정 연설이 있었다. 노 대통령은 국정 연설 끝부분에서 KBS 관련 내용을 거론하면서 “서동구씨에게 KBS 사장을 권유했고 이를 이사회에 간접적으로 추천했다”며 개입을 인정했다. 노 대통령은 “개입한 일이 없다, 이렇게 말해놓고 오늘 이와 같은 과정이 밝혀져서 거짓말을 한 것 같아서 낯이 뜨겁다. 참 난감하다”고 말하고 “그러나 개입이란 압력 행사를 의미한다. 법적으로 부적절한 행위를 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2003년 4월2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노 대통령은 줄담배를 피웠다”

노 대통령은 이날 저녁 청와대에서 KBS 노조,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국정 연설을 마친 노 대통령이 만남을 제안해 마련된 자리였다. 신학림 전국언론노조 위원장, 김영삼 언론노조 KBS본부장, 김현석 KBS본부 공추위 간사, 최민희 민언련 사무총장,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등 5명이 참석했다. 청와대 쪽에서는 노 대통령과 이해성 홍보수석, 유인태 정무수석, 권영만 홍보비서관 등 4명이 참석했다.


이날 간담회 분위기와 대화 내용은 언론노조 KBS본부가 4월3일 발표한 ‘대통령 간담회 내용’에 나와 있다.


“대화 초기에는 주로 노무현 대통령이 이번 KBS 사태와 관련해 자신이 의심을 받은 부분에 대해 노조에 섭섭함을 표시했습니다. 또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처럼 비춰진 데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았습니다. 특히 노동조합이 파업 찬반 투표까지 간 것에 서운한 감정을 많이 표현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자꾸 말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대화가 진행되면서 상호 오해가 있었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대화가 잘 진행되었습니다….”


KBS 노조는 “노 대통령이 KBS 문제가 잘못된 것에 많은 상처를 받은 것 같다”며 “식사가 끝나자 줄담배를 피우셨고, 술도 많이 드셨다. 와인을 더 가져오라고 대통령이 주문하자 주위에서 많이 만류했지만 만류를 뿌리치고 더 드시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노조와 시민사회단체 의견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뜻을 내비쳤고 “이사회가 제청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오면 사표를 수리하겠다”고 밝혔다. 4월4일 노 대통령은 서동구 사장의 사표를 수리했다.


서동구 사장 사퇴 이후 대선캠프에서 활동한 인사가 정치적 독립성을 최우선 가치로 하는 공영방송에 들어올 수 없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하지만 그 원칙은 이명박 정부에서 허물어졌다. 2009년 11월 이명박 대선캠프에서 언론특보를 지낸 김인규씨가 KBS 사장에 취임했다. 노조는 물론 야당, 언론단체들까지 합세해 사퇴를 촉구했지만, 김씨는 3년 내내 숱한 논란을 낳으며 임기를 마쳤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 훼손 시도는 역대 정권에서 그대로 이어졌고, 지금 EBS에서 보듯 변종으로 진화하고 있다. 20년 전에는 사퇴라는 결단을 내렸지만, 지금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염치도 없다는 게 다를 뿐이다.


<참고 자료>
▲기자협회보, <서동구씨 KBS 사장 임명 진통>, 2003년 3월26일
▲조선일보, <노 대통령이 방송 맡아달라 했다>, 2003년 4월2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대통령 간담회 내용>, 2003년 4월3일
▲오마이뉴스, <서동구 전 사장 “지 이사장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 2003년 5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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