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방송국 스튜디오 뒤편의 그림자는 짙고 길었다. 지난해 9월, 고 오요안나 MBC 프리랜서 기상캐스터는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안타까운 죽음은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MBC의 대응, 방송계 비정규직의 현실이 도마 위에 올랐다.
기자협회보는 6일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실에서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 온 김영민 센터장을 만났다. 한빛센터 출범 초기부터 합류해 2022년 센터장으로 선임된 그는 프리랜서라는 모호한 계약 형태가 노동자들을 법의 사각지대로 내몰고 있다며 “과연 이 같은 구조가 언제까지 지속돼야 할지 계속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아래는 김 센터장과의 일문일답.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의 사망 이후 직장 내 괴롭힘 의혹이 나오기까지 약 4개월이 걸렸다.
“뉴스를 보고선 깜짝 놀랐다. 지난해 9월 사망했는데 거의 4개월 뒤에야 보도가 됐더라. 그런데 고 이한빛 PD 때도 그랬다. 사회적으로 대단히 큰 관심을 받았는데, TV 뉴스에선 거의 보도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활동하다 보면 유독 방송사 이슈에 대해 보도가 잘 안되는 경향이 있다고 느낀다. 같은 방송사 처지에선 비정규직의 열악한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누워서 침 뱉기’가 되니 그럴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저는 좀 위선적이라도 보도를 했으면 좋겠다. 어쨌든 이 불합리한 구조가 한 번에 해결될 리도 없고 모든 것이 완벽한 다음에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방송사 기자 분 중에도 분명 비정규직과 관련해 문제의식과 고민이 있는 분들이 많을 텐데 관련 보도가 잘 안 나오는 건 대단히 아쉽다.”
-유서에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호소하는 내용이 담겼다. 비정규직이 구조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에 더 취약한지 궁금하다.
“비정규직 사이에도 사실 어떤 구조적인 문제들 때문에 괴롭힘이 많이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메인 작가가 대단히 위계적, 권위적이어서 아래 작가들이 힘들게 일하는 사례들이 꽤 있다. 기상 캐스터나 아나운서 직군의 경우 특히 방송사가 젊은 여성만 선호하기 때문에 직업 수명이 상대적으로 짧다. 그 얘기는 방송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거다. 프리랜서 아나운서, 기상캐스터는 특히 언제든 잘릴 수 있는 상태이고 나의 자리를 보장하기 위해 옆에 있는 동료와 경쟁해야 하므로 이 구조적 문제가 선후배 등 위계적 문화와 겹치면 당연히 괴롭힘이 일어날 수 있다.”
-비정규직 간의 괴롭힘 문제는 법적으로 처벌될 수 있나.
“지난해 9월 예능 프로그램 제작 현장에서 촬영 감독이 작가의 목을 조른 사건이 있었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작가들이 문제 해결을 요구하면서 제작을 중단하니 계약 해지까지 해버렸다. 관련해 저희가 고용노동청에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불이익 처우 등 진정을 제기했는데 노동청의 대답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노동자가 아니니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에 여러 허점이 있는데, 이 경우는 그걸 넘어서서 프리랜서로 계약했기 때문에 인정이 안 된 경우였다. 물론 이번(고 오요안나씨) 사건의 경우 고용노동부가 노동자성에 대해 논쟁하기보다 근로기준법에 준해 지도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정말 다행이지만 사실 다른 경우에 과연 괴롭힘으로 인정돼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선 대단히 회의적이다.”
-법상 미비가 있다면 방송사 내부에서 해결할 방법은 없나.
“일단 계약부터 바꿔야 한다. 무슨 얘기냐면 기상캐스터를 전속적으로 쓰겠다는 것을 전제하고 공개 채용을 하는데, 막상 고용계약은 프리랜서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공개 채용을 했다는 건 일정 기간 사람을 안정적으로 쓰겠다는 의도다. 기상캐스터의 일하는 방식을 봐도 정해진 방송 시간과 할당 업무량이 있고 지시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프리랜서 계약을 하고 있다. 모순적이다. 방송사가 아나운서나 기상캐스터를 노동법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계약 형태로 전환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한편으론 방송사 비정규직들이 노동조합 같은 기구를 조직해 방송사와 교섭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지금과 같이 MBC가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진상 조사를 할 때 의견도 내고 조율도 할 수 있는, 그런 보완 장치들이 많이 필요해 보인다.”
-노동법의 테두리에 넣어야 한다는 건 정규직 전환을 말하는 건가.
“궁극적으로 그렇게 가면 좋을 거라 생각하지만 우선 당사자들의 입장을 좀 모아봐야 하는 문제인 것 같다. 그것보단 어쨌든 최소한 일정 기간은 안정적이고 법적으로 보호를 받게끔 근로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계약직으로도 쓰기 싫어서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있는 상황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노동법의 테두리에 들어오게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프리랜서는 근로 계약을 안 하나.
“프리랜서라는 말 자체가 사실 법에 없다. 그래서 보통 노동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계약을 그냥 프리랜서라고 칭한다. 가령 사회보험에 가입을 안 해 주고 소득세는 3.3%만 떼는 것이 프리랜서 계약의 특징이다. 그런데 사실은 프리랜서라고 해도 일하는 방식을 따져보면 십중팔구 노동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노동청에서도 노동자성을 하나씩 따져봐야 하는데, 프리랜서라고 하면 대부분 보호해 주지 않는다.”
-언론계에서 비정규직을 많이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 경영상의 이유를 대는데 요즘은 방송사들이 어려운 게 맞다. 예전처럼 방송사가 절대 갑인 시절은 지났고 이제 넷플릭스 같은 OTT가 절대 갑이 됐다. 특히 지역 방송사의 경우 경영 사정이 악화하면서 인력을 계속 축소하고 있고, 그 부담이 비정규직에 제1순위로 전가되고 있다. 기회만 보면 부당해고를 시도하거나, KBS 같은 경우 수신료 문제로 경영이 어려워지니 지국을 통폐합하는 등 움직임들이 많아 저희 쪽에 연락이 오기도 한다. 그런데 경영상의 이슈는 어떤 해법을 요구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정부의 전향적인 정책이나 해법을 요구하기엔 오히려 방송사를 말려 죽이려는 상황이고, 같이 해법을 모색하자니 비정규직엔 힘이 없다.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우 개선을 위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가장 시급하게는 근로감독 같은 노동청의 액션이 좀 더 전향적으로 많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슈가 되면 전향적으로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가 아니라고 판단해 버리는데 노동청의 실질적인 개입이 제일 중요하다. 한편으론 방송사들 역시 지금과 같은 구조를 계속 둘 것인지 고민을 해야 한다. 당장 경영이 어렵겠지만 방송도 결국 사람이 만드는 것인데, 고민이 너무 없어 보인다. 오요안나 기상캐스터를 보면 3개월 동안 숙직실에서 자면서 새벽 방송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제가 확인하지 못했지만 임금도 낮았을 것이다. 대외적으로 대단히 화려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이지만 실상 장시간 노동과 위계적인 조직문화, 저임금에 시달렸을 텐데 과연 이 같은 구조가 언제까지 지속돼야 할지 계속 묻지 않을 수 없다.”
-MBC는 조사위원회를 꾸려 진상 조사를 하겠다고 했다.
“MBC가 첫 입장문에서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들어왔으면 적극 나섰을 것이라 했는데, 유사한 여러 다른 사건들이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MBC의 태도를 봤을 때 프리랜서 사이의 일이니 너희끼리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생각한다. 아마 MBC뿐만 아니라 다른 방송사들 다 그렇게 행동했을 거라 본다. 당연히 철저한 조사가 진행돼야 하고, 이번 사건을 경종을 울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MBC에도 사용자의 책임, 관리자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빛센터에 접수된 상담이나 제보도 늘어났나.
“몇 건 있는데 좀 더 대대적으로 사례를 모아 볼 생각이다. 일단 ‘아 나도 저렇게 괴로웠던 일이 있었는데’ 하는 공감대는 생긴 것 같다. 사실 12월 말을 기준으로 대부분의 비정규직은 계약이 종료되기 때문에 이 시기가 상담이 많이 들어올 때는 아니다. 그럼에도 지난해보다 훨씬 많다. 저희가 지난해의 경우 130건을 상담했는데 임금체불과 부당해고 건이 좀 많았고 직장 내 괴롭힘은 7건 정도 됐다. 괴롭힘 문제는 단독보다는 부당해고나 임금체불과 엮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빛센터는 고 이한빛 PD의 뜻을 이어 방송 현장의 노동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 2018년 만들어졌다. 한빛센터 설립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방송 현장의 노동 환경은 얼마나 달라졌나.
“일단 근로 시간은 확실히 달라졌다. 드라마 같은 경우 예전에는 하루 20시간을 찍고 찜질방에서 자는 식이었는데 이제는 근로 시간을 어느 정도 지키고 있다. 그런데 방송 환경 자체는 너무 많이 달라졌다. 일단 OTT가 절대 갑이 됐고 방송사도 일종의 외주제작사가 되다 보니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논할 장이 없어졌고, 그러다 불황이 오면서 방송 노동자들이 많이 힘들어졌다. 또 유튜브같이 파편화된 미디어들이 많아지니 제작 현장이 소규모화돼 문제를 제기하거나 해법을 모색하기 쉽지 않은 여건이 됐다.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
-한빛센터의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무엇인가.
“요새는 비용 문제로 드라마보다는 예능 프로그램을 많이 제작하는데, 과연 예능 쪽에서 노동권이 잘 지켜지는지 지난해 많이 다뤘던 것 같다. 올해 역시 관심을 가지려 하고, 방송사 비정규직 문제도 어쨌든 저희가 계속 다뤘던 영역이니 지역 방송사 비정규직 인력 축소 등과 관련해 지속적으로 활동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