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위원장이 가족과 친척, 전 직장 동료 등 지인을 동원해 윤석열 대통령 검증보도를 신속히 심의해 달라고 민원을 제기하고, 본인이 이를 직접 심의해 관련 보도를 한 언론사들에 대해 중징계를 내렸다는 의심을 사는 ‘민원사주 의혹’ 사태가 표류하고 있다.
민원사주 의혹을 고발한 내부 제보자들에 대해서는 감사와 고강도 경찰수사가 이어진 반면, 민원사주 의혹의 진상 규명, 절차 부당성 여부에 대한 당국의 조치는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말전도’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번 사태는 기관의 존재 의미인 절차적 정당성과 결과의 공정성을 권력 앞에서 헌신짝처럼 포기한 방심위의 비루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난해 9월 뉴스타파의 ‘김만배-신학림 녹취록’을 인용보도한 방송사들을 징계하라는 집단적 민원이 방심위에 접수된 이후 전개된 사태는 ‘도둑이야라고 외친 사람을 잡는 격’이라고 할 만하다. 류 위원장이 민원사주 의혹을 국민권익위에 신고한 내부자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처벌해 달라고 수사를 의뢰하자 경찰은 15일 만에 수사에 착수했고 방심위를 올해 두 차례(1월, 9월)나 압수수색했다. 경찰 수사가 민원인 개인정보 유출에 초점을 맞춰 속전속결로 진행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류 위원장의 업무방해,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혐의에 대한 당국의 대응은 직무유기 수준이다. 지난해 12월 방심위 구성원의 70%에 해당하는 직원 149명이 권익위에 민원사주 의혹을 신고했는데도 권익위는 사건 처리를 차일피일 미루더니, 사건접수 7개월이나 지나 “진술이 엇갈린다”는 이유로 방심위로 사건을 송부했다. 류 위원장이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는 방심위에 ‘셀프 심의’를 맡긴 점도 황당한데, 방심위는 ‘조사기관은 60일 이내에 조사를 마쳐야 한다’는 규정도 무시하고 조사기간을 연장하겠다는 뜻을 권익위에 통보했다. 언제까지 조사하겠다는 기한조차 없으니 권익위의 적극적 개입이 없다면 자칫 사건이 유야무야될 판이다. 권익위는 제보자들이 공익신고자보호법에 따른 보호대상이냐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기 곤란하다”고 답을 회피했다고도 하니 왜 권익위가 존재해야 하는지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
공익 차원에서 민원사주 의혹을 고발한 당사자들이 사건이 지체되자 자신들의 신분까지 드러내면서 공개 투쟁에 나선 반면 이번 사태를 ‘불법 민간인 사찰’이라는 프레임으로 호도하고 있는 류 위원장의 태도는 궁색하기 짝이 없다. 그는 9월30일 ‘민원사주 의혹’에 관한 국회 청문회에 불참하더니 같은 날 갑자기 딥페이크 대책 관련 브리핑을 열었다. 청문회를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논란이 제기됐는데, 그는 준비된 발언만 읽고 질문도 받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민원사주 의혹이 사실이 아니고 문제가 없다면 국회와 언론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밝히면 될 것 아닌가.
류 위원장은 혹 민원사주가 있었다고 해도 심의결과가 공익 실현을 위한 심의로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민원사주 의혹이 사실이라면 상대를 속여 업무를 왜곡한 것이므로 업무방해가 성립된다는 게 시민단체들의 주장이다. 최근 보다못한 시민단체들이 류 위원장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했다. 수사기관의 엄정한 수사와 사법부의 엄정한 판결만이 권력 비호 기관으로 전락한 방심위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첫 단추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