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보 이동관 3개월, 검사 김홍일 6개월… 캠프 이진숙 한 달?

[뉴스 분석] 이진숙 방통위원장 후보자, 지명 후부터 연일 강경발언
방문진 이사 교체용 '원포인트 인사' 관측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가 8일 오전 경기 과천시 소재 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뉴시스

“방송이 지금은 공기가 아니라 흉기라고 불린다” “공영방송의 공영성 제자리 찾기가 가장 시급한 현안” “‘바이든-날리면’, ‘김만배-신학림 녹취’ 보도는 가짜 허위 기사들, 정부가 방송 장악을 했다면 이런 보도가 가능했겠나”….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가 지명 소감, 인사청문회 준비 첫 출근길 등에서 내놓은 발언들이다.


MBC 재직 시절 공영방송 해체, 노조 탄압 등에 앞장섰던 인사로 꼽히며 언론계에서 비판받아 온 이진숙 전 대전MBC 사장이 방통위원장 후보자로 돌아왔다. 김홍일 전 방통위원장 사퇴 이틀 만인 4일 윤석열 대통령은 새 방송통신위원장 후보로 이 전 사장을 지명했다. 언론계는 즉각 반발하며 이 후보 지명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곧바로 이 후보가 탄핵 대상임을 경고했다. 국회 탄핵소추안 처리를 앞두고 물러난 전임 이동관, 김홍일 위원장에 이어 이 후보도 임명 이후 ‘초단기 방통위원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 후보는 지명 직후부터 공영방송, 사실상 MBC를 겨냥한 발언을 쏟아냈다. 윤 대통령이 김홍일 전 위원장 사퇴 이틀 만에 발 빠르게 이 후보를 지명한 것도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교체를 강행하기 위한 “원포인트 인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 전 위원장은 국회에서 자신에 대한 탄핵안이 발의되자 사퇴 직전 KBS, MBC, EBS 등 공영방송 3사 이사 선임 절차를 개시했다. 방통위는 오는 11일까지 방문진과 KBS 신임 이사 서류 접수 공모를 진행한다. 이 후보도 4일 지명 소감에서 “임기가 끝난 공영방송 이사들을 그대로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밝힌 만큼 인사청문회 등을 거쳐 방통위원장에 취임하면 곧바로 대통령 추천 위원 2명으로만 방문진 이사 선임을 의결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야권 추천 이사가 다수인 방문진 이사회가 여권 우위로 바뀌면 안형준 MBC 사장 해임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언론현업단체를 비롯해 시민사회단체, 현 공영방송 3사 야권 이사들은 ‘세월호 보도 참사 책임’ ‘노조 탄압’ ‘MBC 사영화 밀실 추진’ 등 이 후보의 과거 행적을 들며 방통위원장으로 부적격 인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기자협회와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언론현업단체와 92개 언론시민사회 단체로 구성된 언론장악저지공동행동은 5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이진숙 후보자 지명은 윤석열 정권 방송장악의 최종 목표인 ‘MBC 점령’ 작전을 위한 포석이자 ‘MBC 사영화’ 속내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5일 한국기자협회와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언론현업단체와 92개 언론시민사회 단체로 구성된 언론장악저지공동행동은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지명 즉각 철회하라’ 긴급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뉴시스

이 후보가 8일 출근길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 ‘공영방송의 공영성 제자리 찾기’를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꼽은 데 대해 언론노조 MBC본부는 8일 성명에서 “방문진 이사진을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로 서둘러 교체를 강행해 공영방송 MBC 장악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것만이 이진숙의 유일한 쓰임이며, 윤석열 정권이 이진숙을 방통위원장으로 내리꽂으려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이 후보는 이명박 정권 시절 김재철 MBC 사장 체제에서 홍보국장과 기획홍보본부장 등을 거쳤다. 2012년 기획홍보본부장으로 지낼 당시 최필립 당시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만나 정수장학회가 보유한 MBC 지분 30% 매각 문제를 논의했다는 사실이 한겨레 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 있다. 언론계가 이 후보 지명은 “MBC 장악 이후엔 국민의 재산인 MBC를 사적 자본에 팔아넘기겠다는 ‘MBC 민영화 선언’”이라고 우려하고 있는 이유다. 또 이 후보는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보도본부장으로서 ‘전원 구조’ 오보와 유가족을 폄훼한 보도의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12년 MBC본부 파업 중 MBC가 설치한 사내 보안프로그램의 불법성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이유로 2016년 대법원에서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


이 후보의 MBC 재직 시절 행적들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주요 쟁점이 될 듯하다. 또 이 후보가 지난해 3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태원 참사 전 핼러윈 축제를 예고 홍보한 MBC 보도가 한 가지 사례다. 좌파 언론의 뒤에는 대한민국을 뒤엎으려는 기획자들이 있을 것”이라며 이른바 ‘이태원 참사 기획설’을 암시하는 듯한 글을 올린 점이 드러나 언론계, 정치권의 비판을 사기도 했다. 이 후보는 8일 청문회 준비를 위한 첫 출근길에서 해당 글을 올린 데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중에 답변드리겠다”며 말을 아꼈다.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가 취임하게 되면 윤석열 정부 들어 4번째, 직무대행까지 포함하면 8번째 방통위 수장이 된다. 5인 합의제 행정기관인 방통위가 지난해 8월 말부터 대통령이 지명한 위원장, 부위원장 2인 체제로 파행 운영되는 상황도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이진숙 후보자의 특정 보도에 대한 ‘가짜뉴스’ 발언, 공영방송사 이사 선임 의결 강행 가능성을 두고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탄핵을 예고한 만큼 방통위원장 잦은 교체, 2인 체제 악순환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진숙 후보자는 “방통위 2인 체제 운영 책임은 민주당에 있다”고 주장한다. 8일 정부과천청사 인근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는 길에서 이 후보자는 ‘민주당에서 주장하는 방통위 2인 체제 의결 위법성’에 대한 취재진 질의에 “지난해 8월 국민의힘 방통위 상임위원으로 추천됐으나 야권에서 아예 국회 본회의 표결을 거부했다. 민주당 추천 몫 2명이 공석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 의결을 거친 야권 몫 상임위원을 임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방통위 2인 체제가 이어진 근본적인 책임은 야당 추천 방통위원 임명을 계속해서 미뤄온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방통위 상임위원 정원은 총 5명(대통령 지명 2명, 여당 추천 1명, 야당 추천 2명)이지만, 방통위가 2인만으로 운영되고 있는 건 김효재(여당), 김현(야당) 당시 방통위원 임기가 만료된 지난해 8월23일부터다.


특히 지난해 3월 안형환 전 부위원장(당시 야당 몫) 퇴임 이후 민주당이 최민희 방통위원 추천안을 의결해 본회의까지 통과시켰지만, 윤 대통령은 7개월 넘게 재가하지 않았다. 야당 추천 상임위원 임명은 보류하면서 그 사이 윤 대통령은 그해 5월 김창룡 전 위원(대통령 몫) 후임으로 이상인 위원을 지명했다. 최민희 당시 방통위원 내정자가 그해 11월 사퇴한 뒤로 공석인 국회 몫 방통위원 3명 추천 논의는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방통위 ‘2인 체제 의결 위법성’은 야당이 이동관·김홍일 방통위원장에 대해 탄핵소추안을 발의한 주요 사유였다. 이 후보자가 방통위원장이 돼서 이상인 부위원장과 친여 성향으로 채워진 방문진 이사진 선임 의결을 강행한다면 야당은 탄핵안을 발의하고, 탄핵안 본회의 상정이나 표결 처리 전 스스로 물러나는 전임 위원장들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이동관 전 위원장은 취임 3개월, 김홍일 위원장은 6개월 만에 자진 사퇴했다. 야당에선 이진숙 후보에 대해선 “임기 한 달을 채우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야당이 ‘이진숙 탄핵’을 언급하는 또 다른 근거는 “MBC 출신으로 제척·기피 대상”이라는 점이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민주당, 조국혁신당 의원 일동은 4일 성명에서 “MBC 출신으로 이사 선임, 방송사에 대한 허가·승인에 참여하는 것은 제척, 기피 대상이 된다”며 “1인은 회의를 개회할 수 없고, 만약 강행하면 방통위 설치법 위반이 된다. 탄핵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특보 출신(이동관), 검사 출신(김홍일)에 이어 대선 캠프 출신(이진숙)까지 방통위 수장 자리에 정치적 중립성과 무관한 인사를 무리하게 임명해 방통위를 정쟁화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윤복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은 5일 언론장악저지공동행동 기자회견에서 “이진숙씨는 삐뚤어진 언론관과 노조를 적대시하는 노동관, 게다가 근거 없는 음모론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문제 많은 인사”라며 “윤 대통령은 방통위를 앞으로도 쭉 대통령이 지명한 2인만으로 운영하겠다는 고집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방통위원장 탄핵안 발의→방통위 주요 의결→탄핵안 처리 전 자진 사퇴’가 반복될수록 방통위 업무 마비 상태는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2014~2019년 방통위 상임위원을 역임한 고삼석 동국대 석좌교수는 “2008년 방통위 출범 이후 이 정도로 파행 운영된 적이 없다”며 “지금 공영방송 이슈만 주목하고 있지만 사실 방통위는 인공지능 관련 규제, 이용자 보호 등 방송·통신 산업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우려했다. 이어 “국회가 정쟁으로 끌고 가려고 하더라도 대통령은 해법을 제시하려 노력해야 하는데 오히려 대통령 입맛대로 방통위원을 임명하면서 국정 운영을 이전투구로 만들어 버렸다”고 지적했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