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친 블박영상' 제보, 검증없이 보도… 방송사도 법적책임

의식 없는 운전자 동의 없이 수집
업자, 방송사에 사례비 받고 넘겨
변호사들 "전형적인 미필적 고의"

불법 취득이 의심되는 차량 블랙박스 영상이 제보되고 있어 보도에 주의가 요구된다. 운전자 동의 없이 사고 차량을 뒤졌다면 수색죄가 성립하는데, 언론사가 이를 묵인하고 영상을 받아 쓰면 법적 책임을 함께 져야 할 수 있다.

수년 동안 전국의 교통사고 영상을 제보해 온 제보업자 송모씨가 최근 불법성이 있는 블랙박스 영상<사진>을 방송사에 제보하고 있다. 송씨는 지난달 9일 저녁 전라북도 정읍시 호남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수습하던 도로교통공사 직원을 치어 숨지게 한 가해자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을 제보했다. 새벽 사이 제보를 받은 언론사들은 다음 날 아침 사고를 보도했다.


충돌 직후 블랙박스 녹화가 바로 꺼질 만큼 사고는 컸고, 가해 운전자는 의식이 희미한 상태로 병원으로 옮겨져 영상을 제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정읍경찰서도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수사자료로 확보했고 언론에 영상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확인했다.


이 업자는 지난해 1월3일에는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10대 운전자가 렌터카로 대학생을 치어 숨지게 한 사고 영상을 제보했다. 렌터카 업체는 “회사 소유인 블랙박스 영상이 어떻게 방송에 나갔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며 “당시 방송을 보고 당황했지만 문제를 제기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제보업자는 “소유자에게 동의를 구하고 받은 건 명백히 아니”라고 인정하면서 “취재원과 경위는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인터넷 매체 프리랜서 기자이기도 한 이 업자는 전국의 렉카(견인차) 기사들과 관계를 쌓고 사고 영상이나 사진을 받아 왔다. 방송사마다 3~5만원 정도 제보 사례비를 받아 이들과 나누는 구조다. 지역 방송사를 비롯해 지상파와 종편, 보도전문채널은 물론 뉴스 통신사와 몇 인터넷 매체에도 영상을 판매한다.


기자들이 영상의 출처를 전혀 의심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한 지역방송사 기자는 “송씨가 출처가 불분명한 영상을 제보한 일이 더러 있었다”며 “누가 봐도 사고 차량 운전자가 중상을 입었거나 사망해 동의를 안 받은 게 분명해 보였는데 어디서 떼왔느냐고 대놓고 묻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보도전문채널의 기자는 “방송사는 그림 낙종을 항상 경계한다”며 “제보비를 계속 요구해 한동안 거래를 끊었는데 계속 물(낙종)을 먹으니 최근 다시 영상을 받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전 지역 방송 3사는 지난해 2월6일 건양대병원 앞 다중충돌 사건 때 영상의 입수 경위가 의심스럽다며 함께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교통사고 분야를 다뤄 온 서아람 변호사는 “블랙박스의 메모리카드 자체를 절도하지 않고 차 안에 들어가 영상을 복사하기만 해도 자동차수색죄가 된다”며 “구석구석 뒤지는 행동 없이 곧바로 영상을 찾아도 판례에서는 수색죄를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거지나 건조물, 자동차 등을 뒤지는 수색죄는 벌금형이 없고 3년 이하 징역형만 있는 중범죄다.


서 변호사는 “불법적으로 얻은 영상이라고 짐작하면서도 계속 거래했다면 불법을 눈감고 암묵적으로 동의한 전형적인 미필적 고의”라며 “정도에 따라 공범이나 방조범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블랙박스 영상 안에 등장한 사고 피해자 등을 흐림 처리해 보도하더라도 모자이크되지 않은 영상을 제보받는다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 될 수도 있다.


박아란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대체할 수단이 없거나 꼭 보도해야 할 비상한 공적 관심사가 아니라면 이런 영상 사용은 정당화가 어렵다”며 “‘장물보도’가 허용되기 시작하면 만인이 불법으로 얻은 자료를 언론에 넘기려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고 말했다. 제보업자는 불법성을 인정하고 주의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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