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버닝썬 다큐'는 무엇이 다른가

[이슈 인사이드 | 젠더] 정지혜 세계일보 외교안보부 기자

정지혜 세계일보 외교안보부 기자

지난 일주일 동안 온라인에서 큰 화제가 된 BBC뉴스 코리아의 다큐멘터리 ‘버닝썬: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봤다. 영상은 5년 전 한국 사회를 타격한 일명 ‘버닝썬 게이트’를 가해자들의 출소 시기에 맞춰 재조명했다. 수년 전 일어났던 충격적 사건으로서만 다루지 않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문제로 묵직한 한방을 날리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버닝썬 사태의 핵심이 뿌리 깊은 여성혐오라는 점을 명쾌하게 드러냈기에 충분히 강렬할 수 있었다.


영상을 시청하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물음은 ‘왜 이런 보도는 한국 언론에서 보기 힘든가’였다. 1차 책임은 언론에 있으나 대중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에선 미디어 생산자와 수용자 모두 버닝썬 사태를 여성혐오 범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개선해야 할 구조적 문제로 보는 공감대가 떨어졌기 때문에 이번과 같은 ‘돌직구 콘텐츠’를 외신에 뺏기고 말았다.


이른바 ‘물뽕’으로 알려진 성범죄 마약 GHB의 남용 실태, 클럽 은밀한 공간에서의 성폭력, 성상납 관행 등의 실체를 한꺼번에 까발린 대형 스캔들이었지만, 결국 이번에도 같았다. ‘여성이 피해자가 되는 범죄’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미약했다는 것 말이다. ‘클럽에 드나드는 조신하지 못한 여성들의 운 나쁜 하루’에 내심 덜 공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피해자 중에는 그저 정준영의 지방 팬사인회에 참석했을 뿐인 여성도 있었으며, 어떤 행실의 여성이 피해를 당했느냐는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다.


사건이 터졌을 당시엔 사회를 뒤흔드는 듯했으나 시늉뿐이었음이 BBC 다큐를 통해 드러났다. 국내에선 유명인이 연루된 선정적 사건으로나 소비되며 단발성 조회수 뽑기용에 그쳤단 얘기다. 가벼운 처벌마저 끝나고 사회 복귀를 점치는 가해자들과 제2, 제3의 버닝썬 같은 곳이 지금도 즐비하다는 현직 업계인의 증언 등은 바뀐 것이 거의 없음을 증명했다. 반면 피해자들과 사건의 실체를 파헤친 여성들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버닝썬 사태를 다루는 한국 언론의 기사는 여성혐오라는 본질은 거의 건들지 않는다. 진정성도 책임성도 없다. 처참한 피해 묘사로 여성 집단에 공포나 조장하고, 성범죄 보도가 또 하나의 선정적 콘텐츠로 취급되는 경향이 포착될 뿐이다. 이는 모두 여성 집단에 무언의 압박을 가하며 이들이 움츠러들게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BBC 다큐 이후 또 한바탕 가해자를 규탄하고 피해자 증언을 보도한 기사가 쏟아졌지만, 어디까지나 외신 보도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받아쓴 것에 불과하다.


부제에서 보듯 BBC의 보도는 버닝썬 문제를 추적하고, 고발하고, 증언한 ‘여성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이 다큐가 여성혐오 범죄의 본질을 정확히 겨냥하는 방식이다. 남성 중심 사회가 굳이 들춰오지 않았던 ‘남성의 여성 대상 범죄’를 여성들의 용기와 연대로 세상에 폭로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불법촬영 피해자였기에 가만있을 수 없었다는 가수 고(故) 구하라씨의 결정적 제보 내용이 새롭게 밝혀지기도 했다. 버닝썬 게이트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의미와 희망이라면 이런 여성들의 존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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