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5월 경남도민일보 탄생은 사건이었다. 구 경남매일 기자들이 권력화된 ‘토호언론’ 병폐를 극복하겠다며 새 신문사 창간에 나섰다. 6000여명 도민이 십시일반 뜻에 동참하며 이 ‘개혁적 지역정론지’를 낳았다. 지역일간지로서 도민이 신문사 주인인 드문 형태의 소유 구조는 여전히 이 매체의 정체성 핵심을 이룬다. 이런 토대에서 신문사는 그동안 다른 결의 보도, 논조, 시각으로 지역에서 자리 잡았다. 세분화된 금품수수금지 기준(1만원 미만 기념품 정도만 예외) 등을 포함한 기자실천요강을 초기부터 제정하고, 사내 민주주의를 확립해 오기도 했다.
구주모 경남도민일보 대표이사는 이 과정 전체를 보고 추스르고 이끌어 온 인물이다. 1988년 경남매일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지역언론인은 1998년 경남도민일보 창간추진위 실무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기획문화부장, 지역여론부장, 경제부장, 취재담당 부국장, 편집국장을 거쳐 오너 없는 지역일간지에서 약 14년간 사장직을 수행해왔다. 대자본의 이해관계‧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기업은 경영 측면에서 난관 그 자체다. 늘 위기였지만 도민이 주인인 매체를 오랜 기간 지켜온 그는 퇴임의사를 밝힌 상태다. 본보는 21일 경남 창원시 양덕동 한 빌딩 6층 경남도민일보 사장실에서 구 대표이사를 만나 그간의 소회와 진로, 지역언론 위기, 경남도민일보의 현재 등을 물었다. 이하 일문일답.
-2010년부터 맡아온 사장에서 물러난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이전 사장의 잔여 임기 1년 6개월에 3년 임기를 4번해서 13년 6개월 정도를 했는데 구성원들이 지겹지 않겠나. 할 만큼 했고 너무 오래 하다 보니 건강도 안 좋아졌는데 구성원들도 (뜻을) 흔쾌히 받아줘 물러나기로 했다. 모든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거고, 이제 그냥 제대를 하게 된 거다.” 퇴임 이유와 관련해 구 사장은 그간 기자나 직원, 노조 등을 만난 자리에서 “하던 방식으로 해서는 다른 결과를 도출하기 어렵다. 잘 된다는 보장이 없어도 변화 자체가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제가 퇴직을 하더라도 밖에서 회사를 최대한 도울 테고, 변화에 방점을 두는 것”이라 밝혀왔다.
-경남도민일보 창간추진위에서 활동한 게 37~38살(1961년생) 때다. 당시 창간에 나선 배경은?
“처음엔 신문사 소유주가 뜻을 갖고 시작한 언론인이었는데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힘드니까 경영에서 퇴진을 했고 건설사가 인수를 했다. 건설사주도 나름 양심적이어서 특별히 무리한 요구를 하진 않았는데 (IMF 때) 그분도 사업이 부도가 났다. 사주가 괜찮았다지만 대외적인 압력이 있었고 여러 가지로 불편했던 상황에서 단순히 신문을 이어가는 게 아니라 언론인이 직접 지배를 하는 신문을 창간하자는 뜻이 모였다. 대부분은 떠났지만 괜찮은 신문에 갈증을 느낀 기자들, 지역사회에서 그런 괜찮은 신문에 대한 큰 열망이 결합이 된 결과였다.”
경남매일은 IMF 외환위기 당시 지배회사 동성종합건설이 부도가 나며 폐간됐다. 1인 사주체제에선 신문의 발전적인 미래가 없다는 데 의기투합한 기자들이 1988년 국민주 방식으로 창간된 한겨레신문을 연구하며 도민주주신문 창간에 나선다. 당시 기자들은 실업급여로 생활비를 충당하며 자금확보에 나섰고, 6000여명 도민주주를 모아 경남매일 폐간 6개월여 만에 경남도민일보를 창간했다.
-고향이 창원 동읍이고, 대학 전공은 물리학이다. 언론계에 들어온 계기는?
“그때만 해도 전공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독서클럽 등을 통해 늘 책을 읽고 ‘문학청년’ 꿈을 많이 키웠는데 대학은 적만 두고 다니다 졸업 후 고향 신문사에서 처음으로 기자 뽑는 시험에 응시해서 된 게 시작이었다. 물리학을 전공하면서 문과생 범생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좀 많이 벗어난 건 사실이다. 이후에도 계속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같은 물리학 고전을 읽었는데 생명의 본질, 우주 만물의 구성원리를 생각했던 게 기자생활에 큰 힘이 됐다. 쫄병 기자 때 건축학과 출신으로 기사를 굉장히 잘 쓰는 동료를 보며 전공이나 좋아하는 분야가 따로 있는 사람이 기자를 하는 게 중요하구나 많이 깨달았다.”
-그래서 본인은 어떤 기자였나?
“쫄병 기자 땐 밤낮도, 휴일도 없이 일선에서 기자생활을 좀 빡세게 했는데 전형적으로 특종을 많이 하는 그런 기자는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에 신경을 많이 썼다. 예컨대 1990년대 초 농촌지역에 막 아파트가 처음 들어서던 때, 6개월에 걸쳐 경남 농촌지역 아파트 십여 곳을 다니며 처음 들어온 아파트문화가 기존 농촌 공동체 문화와 어떻게 충돌을 일으키는지 기획을 했고 상당히 호평 받았다. 한국기자협회 한국기자상에 도전하려 했는데 그때 우리 신문사가 파업을 했었다. 동료들은 파업하는데 상 받으러 서류 내고 이러는 게 쪽팔려서 스톱을 했는데 지금도 좀 아쉽다. 지금 보면 그대로 해도 됐는데 ‘가오가 있지’하고 포기했던 거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들여다보는 데 관심이 많아서 그런 기획을 많이 한 기억이 난다.”
2011년 8월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종합편성채널의 직접 광고영업을 저지하고 국회에 미디어렙 법 제정을 관철한다는 취지로 총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경남도민일보는 지역일간지로선 유일하게 신문발행까지 중단하며 파업에 참여했다. 창간 이래 경남도민일보가 윤전기를 세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10년 6월 혼란스러운 시기 사장이 됐다. 결심에 어려움은 없었나.
“그때 회사가 굉장히 어려웠다. 회사는 빚더미에 앉았는데 사장은 갑작스레 사퇴를 했고 사원들도 굉장히 탈기(지쳐서 기운이 빠짐)를 해서 저도 막막했다. 백마 탄 왕자가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다는 게 제 일관된 신념인데,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처음 가진 뜻을 강하게 밀어붙이면 못할 게 뭐 있냐는 오기는 있었지만 마음을 먹기까진 고민을 많이 했다. 동지들과 상의를 했지만 누구에게도 다 내보일 수 없는 게 많이 힘들었고 지금은 잘 지나서 추억이지만 잘못했으면 지옥이 되는 거였다.”
당시 경남도민일보 사장은 여러 개혁조치를 실행하며 내부 반발이 나오던 중 본인이 지명한 편집국장 후보자(김주완 기자)가 임명동의 투표에서 부결되자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직전 공모를 통해 외부에서 영입한 대표이사가 경영을 개선하지 못해온 상황 등이 있던 터 당시 구주모 상무는 기자들을 설득해 조직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경영진 인선 작업을 했다. 이후 사원들로부터 사장으로 추천됐을 때 그는 김주완 후보를 다시 편집국장 후보로 지명할 것이고 부결되면 본인도 그만둔다는 조건을 걸고 사장직을 수락했다.
-도민 주주란 소유구조, 민주화된 사내 의사결정 등은 경영인으로선 난점 아닌가.
“원래 독재가 한 번에 깔끔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민주주의는 복잡하고 많은 의견을 조율해야 돼서 피곤한 거지 않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돈은 돈대로 벌어야 하는데 민주주의 프로세스는 지키는 이중고, 현실적인 그런 적용이 굉장히 힘들었다. 신문사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지역기업, 관계기관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경남의 정치 지형도는 보수이고 초창기엔 빨갱이 소리도 들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민주적 시스템을 구축했다’ ‘외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캐치프레이즈 자체 때문에 그랬던 듯하다. 신문 발행인으로서 외압을 겪는 일은 사실 본질이고, 케이스에 따라 불만은 여전히 나오지만 25년 세월이 쌓이니 지금은 우리의 컬러 자체를 문제 삼는 일은 거의 없는 편이다.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현재 내부에선 구성원 대부분이 제가 따로 얘기하지 않아도 회사 사시(‘약한 자의 힘’)에 걸맞은 방향으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간 경영인으로서 자신을 평가한다면?
“창간발기인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우리 도민일보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오늘까지 오는 동안 옆에서 버팀목을 했다는 정도가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점일 거 같다. 코로나로 쉽지 않았고 경기는 안 좋고, 회사는 여전히 어렵다. ‘우리 회사에도 스티브 잡스가 있어야 되지 않냐’는 말을 해왔는데 그런 질적 도약은 제 능력으론 무리였다. 현재 시스템에서 우리 동료들이 지금까지 오는 동안 배운 게 있고 후임자는 제가 가지지 못한 자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질적 도약을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저는 그 토대를 마련한 정도로 만족한다.”
-14년 지역신문사 사장으로서 언론의 위기, 지역의 위기를 뭐라고 보나.
“언론 위기는 자본주의가 심화되며 본질적으로 소위 공기(公器)로 표현되는 언론의 역할, 퍼블릭(public)이 설 공간이 사라진 거라 본다. 프랑스처럼 정부기금으로 기본적인 생존자금을 대주면서 언론에 공적 역할을 해라 하는 국가적 시스템 구축 없이 정글 자본주의에서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언론에 공적 역할을 요구하는 건 연목구어이고 불가능하다. 언론이 사설정보업체가 된 현실을 뛰어넘으려면 언론계 전체를 재편할 새 시스템이 도입돼야 하는데 아무도 도입할 수 없고 그런 생각도 안하는 게 지금 제일 큰 위기다.
특히 서울의 족벌언론들이야 자기들이 가진 유동‧비유동 자산이 많지만 지역언론은 규모가 작고, 특히 경기가 안 좋을 때 버틸 수단이 전무하다. 우리 같은 시민 주주 신문은 더 그렇다. 전국의 지방신문이 고군분투하지만 대다수가 건설자본, 학원, 재단, 제조기업 등에 다 예속돼 있는데 이 상태가 진행되면 국민이 바라는, 정도를 걸으며 한국사회를 위해 기능을 해줄 언론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경남도민일보와 같은 모델을 지원해줄 방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한국사회 뒤틀린 언론질서를 바로잡기는 요원하다고 저는 생각한다.”
-현재 경남도민일보 경영 상황은 어떤가. 재임 중 가장 힘든 시기는?
“경영적인 부분은 정말 답이 없다. 독립을 지향하며 나아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광고판매사업을 통해 유지해야 하는데 이 시장이 고사 상태이고 엄청나게 고전하고 있다. 계속 견뎌왔고 지금도 어렵지만 우리가 잘한다고 해결될 성질이 아니란 게 심각하다. 농담 삼아 구성원들에게 ‘야, 올해 어렵다’ 그러면 ‘예,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반응이 절대 안 나온다. ‘우리가 언제 안 어려웠나, 우린 항상 위기다, 25년째 위기다’ 그런 말이 나온다. 늘 힘들었고, 그건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간부들은 그래서 다른 조직하고 감각이 좀 다른데 많이 정신적으로 피로하리라 생각한다. 잘 나가다가 위기가 와서 바짝 긴장하는 게 아니라 열두달 내내 긴장해 있으니까.”
-삼국지, 수호전과 관련해 책(<수필 삼국지>, <혼돈의 시대 수호전을 다시 읽다>)을 썼다. 글쓰기에 관심이 많나?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인가?
“독서를 좋아하고 글 쓰는 걸 좋아해서 내놓은 잡문이다. 역사를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부분에 관심이 좀 많아서 짬짬이 가욋일로 해왔는데 지역사회 리더들이나 기관장들에게 신문사 이미지를 좀 개선하고 도민일보가 내공 있는 조직이란 걸 알리는 선전물로 써먹어왔다. 지금도 회사에 찾아오는 손님이나 후원회원들에게도 그 책을 선물하고 있다.
음악과 예술을 좋아하는데 스트레스 발산 차원은 아니고 그게 제 본질인 거 같다. 제 세 가지 관심 분야가 역사와 음악, 진화생물학인데 우리 경남도민일보하고 좀 결부를 해보면 좋겠다 해서 14년째 재즈 콘서트를 주최하고 있다. 굉장히 독특한 컬러를 가진 고급문화 공연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고 분야에 제가 관심이 있고 깊이를 아니까 그걸 토대로 좋은 친구들과 연계해 만들고 있다. 단순히 취미가 아니라 도민일보에 성장 동력을 불어넣는 데 힘이 됐고 유용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구 대표는 발행인편지나 후원회원에게 보내는 글 등을 통해 계속 글을 쓰고 있다. 사장 신분으로 지면에 재즈 이야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재즈와 인문학, 역사를 결합한 토크콘서트, 특강도 해왔다.
-큰 규모가 아닌 지역언론으로서 꾸준히 보도로 상을 받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아왔는데?
“도민일보의 문화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언론 본연의 임무에 헌신하는 분위기, 뭐가 중한지 아는 간부들의 판단, 지역사회에서 경남도민일보가 하는 일에 지지를 보내주는 분들, 이 3개가 맞아떨어져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검찰예산 시리즈는 다른 지역신문은 하기 어렵다고 저는 생각한다. 한 동네에서 오래 생활을 한 언론인들은 책잡힐 게 많고, 서울은 더 할 거라 본다. 우리라고 백로처럼 깨끗한 건 아니겠지만 비리 약점을 잡히게 살아오진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체질이기도 하다.
다큐 <어른 김장하>가 영화가 되면서 김주완 기자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항상 공공연히 하는 얘기가 있다. ‘이걸 기획하고 만들 수 있었던 건 경남도민일보란 토양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란 말이다. 다른 데였으면 생각을 가졌어도 못했을 거란 그 말이 복잡한 설명 없이 모든 걸, 도민일보의 문화를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경남도민일보를 포함한 5개 언론사, 3개 시민단체가 협업한 ‘검찰 예산 검증 공동취재단은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다수 기자상을 수상했다. 검찰 특수 활동비를 검증한 보도는 권력기관 감시란 언론 본연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보도 이후 올해 검찰 특활비 예산이 10% 감액되고 지침을 공개하겠다는 법무부 약속이 나오기도 했다. (관련기사: <'무소불위' 검찰 특활비...언론사 협업, 공익을 낳다>)
-디지털에서도 계속 시도를 이어왔는데?
“하드웨어적으로 이야기하면 저희들은 장비도 없고 인력도 부족하다. 소프트웨어적으론 거창한 얘기를 많이 하지만 우린 지역밀착으로 해왔다. 디지털이란 기술을 통해 요즘처럼 언론과 시민사회, 독자들이 유리된 분위기에서 우리 독자층이 존재하는 지역사회에 대해 웃는 얼굴로 손을 잡아주는 걸 하려 했다고 보면 된다. 소프트웨어도 약하지만 지역민을 향해 손을 더 내미는 방향은 정답이라 본다.”
-현재 후원제의 성과는 어떤가. 가능성을 보고 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일 힘든 게 내 생각을 남의 머리에 넣는 거,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게 가져오는 거 아니겠나. 소액이라도 매달 가져오는 게 사실 쉽지 않다. 22일 현재 후원회원 수가 1615명(일시후원 제외)이고 재임 중 3000명이 목표였는데 허황된 수치였다는 게 백일하에 드러났고 후임의 과제가 됐다.
그래도 지갑을 열고 흔쾌히 동참해준 1600명이 작은 성과라고 생각지 않는다. 요청에 따라 상응하는 기획물이나 기사를 생산해 왔고 도민일보에 대한 후원자들의 신뢰는 크지만 정치지형이나 지역이란 점 때문에 확장성이 떨어지는 한계가 있었다. 굉장한 돈을 버는 게 아니더라도 종이신문이 떨어지는데 이 매개를 통해 도민일보 가치를 환기시키고 독자 이해도를 높이는 역할은 하고 있다. 기자들도 후원회원 단톡방을 통한 피드백을 최대한 수용하려고 노력하는 등 편집국이 변화하는 부분도 있었다.”
경남도민일보는 2019년 후원제를 도입했지만 코로나19로 운영을 중단했다가 2022년 5월 창간일을 기해 재가동에 나섰다. 후원제는 독자 기반 수익모델의 하나로 계약관계보단 매체의 가치에 대한 지지를 바탕에 둔 방식에 가깝다. 후원자들의 취재요청에 편집국장이나 데스크가 유튜브를 통해 답을 하고, 실제 기사를 내놓거나 온라인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시도가 이뤄졌다. (관련기사: <후원제 재가동 3개월, 회원모집 탄력 붙은 경남도민일보>)
-퇴임 이후엔 뭘 하는 건가. 가족들은 이제 그만한다니 뭐라던가
“하루에 한 서너 명씩 지인들이 전화를 해서 ‘그럼 뭐 할끼요?’ 묻는다. 그러면 늘 저는 교착 관계에 빠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 집에서 푹 쉰다고 농을 한다. 일을 할 땐 일주일에 거의 6일씩 술을 마시다보니 건강이 안 좋아졌는데 당분간은 그냥 집에서 좀 쉬면서 몸과 마음을 좀 추스리려 한다. 이후엔 지역사회를 위해 할 일을 찾고 원로 아닌 원로로서 우리 도민일보가 잘 굴러갈 수 있도록 역할을 할 거다.
집에서 제 별명이 공적이다. 경남매일 입사 전에 제가 결혼을 해서 딸이 만으로 35살인데 어릴 때 휴일 날 단 한 번도 손잡고 어디 놀러 가본 적이 없다. 술 먹고 뻗어있는 아버지 본 기억밖에 없다는데 집에서 난 고개 팍 숙이고 말도 못 붙이고 가만히 있는다. (그만둔다고 하니) 가장의 결정이라 존중은 하는데 뭐 먹고 살거냐고 물어서 아직 안 정했다고 하니 아내가 3개월은 봐주겠는데 4개월부턴 생계 전선으로 나가야 된 데서 고민이다.”
-후임자에게 어떤 과제를 남기게 된 걸까. 걱정이나 하고 싶은 말은 없나.
“가까운 분께 ‘후임에게 짐을 많이 넘겨 마음이 무겁다’고 했더니 ‘왜 당신이 걱정을 하냐, 새 사장이 걱정할 텐데’란 촌철살인을 해줘서 위로를 받았다. 가장 큰 문제는 80명에 육박하는 조직의 사원들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재정 문제다. 깔끔하게 부담 없이 할 수 있도록 해놓고 나가는 게 제일 좋은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차기 대표인 임용일 상무는 창간발기인으로서 도민일보 정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저와 5년간 경영도 함께 해왔다. 저와는 다른 자기만의 인적 네트워크도 있다. 무엇보다 후임과 구성원들에 대해 제가 믿음이 좀 있다. 우리 구성원 전체에게 도민일보를 잘 만들겠다는 그 정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잘 결합되면 어려움은 있겠지만 충분히 잘 해결하고 믿음을 현실화할 것이라 저는 생각한다.”
앞서 경남도민일보 우리사주조합은 지난 4일 사원총회를 열고 동의투표를 거쳐 차기 대표이사 사장 후보로 임용일 상무이사를 선정했다. 28일 이사회‧주주총회에서 선출여부를 결정한다. 임 후보자는 1990년 경남매일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고 경남도민일보 노조 초대위원장, 편집팀장, 시민사회‧경제‧자치행정1부장을 역임했고 부국장과 편집국장을 거쳤다.
-기자들이나 직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나. 경남도민일보는 어떤 의미인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잔소리가 된다. 경영국, 편집국 간부들과 송별 저녁을 하면서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안하고 ‘한 잔 해라’하고 끝냈다. 그렇게 하면 다 안다, 믿는 거. 한두 달 전에 편집국 모 간부가 이제 뭐할 거냐고 물어서 농반진반으로 ‘난 도민일보 근무하면서 이후 삶을 10분 이상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내 삶 자체였다. 오늘 총무국 직원들과 고별 점심에선 ‘퇴임하고서 술 많이 먹은 다음 날 아침 출근할지도 모른다, 조심해라’고 했는데 그 말로 갈음하겠다.
지역에서 나름 목소리를 내고 상을 받으며 주목받는 것도 있지만 저는 도민일보의 문화를 강조하고 싶다. 그게 뭔데라고 하면 딱 꼬집기 어려운 게 문화지만 그 분위기와 흐름이란 건 있지 않나. 약자에게 손을 내밀고 세상을 따뜻하게 보고 언론이 응당 해야할 일을 하는, 우리가 숙성시킨 그 고유 문화야 말로 다른 조직에도 적용될만한 소중한 자산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도민일보가 굉장히 유니크하고 훌륭한 조직이란 말씀은 꼭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