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직관의 유혹과 직업의식

[언론 다시보기]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위르겐 클린스만 한국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이 논란 끝에 경질되었다. 감독으로서의 자질은 실망스럽지만, 그는 여전히 위대한 축구선수다. 선수 시절부터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클린스만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독일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출전해 잠비아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1994년 미국월드컵 당시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전반 시작 12분 만에 대여섯 명의 한국 수비수들이 페널티 박스에 포진해 있는데도 묘기에 가까운 멋진 터닝 발리슛을 작렬시켰다. 이것을 시작으로 독일은 전반에만 3골을 몰아넣었고, 그 중 2골을 클린스만이 넣었다. 클린스만은 슈투트가르트, 인터밀란, AS모나코, 토트넘 훗스퍼, 바이에른 뮌헨 등에서 뛰며, 독일 대표팀 선수로 A매치 108경기에 출전해 47골을 터트렸다. 선수로서의 클린스만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레전드 스타였다.


실제로 카타르 아시안컵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 대표팀의 공식 기자회견장은 클린스만 감독의 개인 팬사인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북적거렸고, 외신기자들은 그의 유니폼을 가져와 사인을 받거나 기념 촬영을 했다. 이는 언론인의 직업의식에 어긋나는 행동이지만, 아시아 축구 무대에 등장한 세계적인 레전드 스타 감독 앞에서 기자가 아니라 일개 팬으로 처신하는 기자들은 의외로 많았다. 결국 대회조직위원회까지 나서 기자들에게 “취재 현장에서 팬처럼 행동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클린스만 감독은 짜증은커녕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 “이런 일은 내 인생의 일부”라며 미소 지었다. 이처럼 해외에서 큰 인기를 누리던 그의 미소는 한국 축구팬들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요르단과의 경기에서 충격적으로 패배한 직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클린스만이 손을 흔들며 활짝 웃은 것에 대해 한준희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한 방송에 출연해 “공감능력과 직업윤리가 결여”되었다고 질타했다.


실은 이와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졌다. 최근 국민의힘은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와 인재영입 발표 등을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진행하고 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4월10일 총선에 집중하기 위해 비상대책회의를 당사에서 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선거대책위원회나 공천관리위원회 회의 등 주요 당직자회의가 중앙당사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같은 건물에서 회의를 진행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판단이었다. 그 때문에 국민의힘 출입기자들은 국회 본청 당대표실이 아닌 중앙당사로 이동해 취재해야 하는 불편함을 겪고 있다. 중앙당사는 일반인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고, 경찰이 출입자의 신분 확인을 실시한다. 게다가 3층 대회의실은 장소가 협소해 일부 당직자와 기자만 출입가능하기 때문에 원한다고 누구나 취재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런 이유로 아이돌 콘서트처럼 취재하기 어렵다는 불만도 나온다.


사건은 지난 2월15일, 중앙당사 3층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장에서 벌어졌다. 좌석이 부족해 맨 바닥에 앉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기록하던 기자들 눈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한동훈 위원장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두 여성이 포착된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기자들이 수군거리며 일반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회의에 참가할 수 있었는지 따져 묻게 되었다. 국민의힘 당관계자들에 따르면 두 여성은 MBN 영상 기자의 가족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당 회의가 학부모 참관수업도 아니고, 팬클럽 사인회도 아닌데, 아무런 사전양해도 없이 일반인의 참관이 불가능한 취재현장에 가족을 대동하고 온 것이다.


해마다 영국 옥스퍼드대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발표하는 언론신뢰도 평가에서 한국은 28%로 아시아·태평양 국가 가운데 최하위였다. 한국축구는 대표팀 감독이 아무 전술도 없고, 선수끼리 불화가 있는 상황에서도 아시아 4강에 들지만, 한국 언론은 아시아에서도 언론 신뢰도가 최하위이다. 팬심과 직업윤리 사이의 구분은커녕 동료에 대한 예의조차 없는 언론인이 너무 많은 탓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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