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경태다. 한겨레 사회부 기자다. 작년 6월26일부터 연재한 역사 논픽션 ‘본헌터’를 최근 마무리했다. 회당 많게는 20매 안팎의 글을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주 2회 인터넷 한겨레에 올렸다. 전체 분량은 1000매에 달한다. 12월20일로 마지막 50회 연재분을 끝내면서 “어깨를 무겁게 눌러온 글쓰기의 짐 하나를 내려놓았다”고 했다.
지난달 27일 오후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3월29일 조간신문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이 ‘본헌터’의 시작”이라고 했다.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산110, 성재산 1~2호 능선의 교통호 참호 안에서 쪼그려 앉아있는 채 발굴된 유해. 2023년 3월 성재산 교통호에서 나온 총 62구 유해 중 하나로, 한국전쟁기에 재판 없이 처형된 민간인 희생자였다. 그 유해는 25m 매장지 남쪽 최초 발굴 지점에서 북쪽으로 4m 떨어진 곳에서 나온 5구 중 하나라 하여 A4-5로 명명됐다.
몸통은 무차별 난사 당했지만 머리뼈부터 다리뼈까지 완전유해 상태로, 최후 순간의 표정이 잡힐 듯 생생한 유해였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저 사람 누구지?” 호기심이 일었고, 그래서 만난 사람이 박선주 선생(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이었다. 박 선생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유해 발굴 주체인 성재산 현장의 책임조사원이었다. 4월18일 아산 성재산 발굴현장 앞에 설치된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연재에 썼듯이 박 선생의 세계는 “거대하고 광활했다”. 쪼그려 앉아있던 A4-5의 나이, 키, 직업에서 시작해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발굴,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민간인 희생자 발굴,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의 영역으로 나아갔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네안데르탈인 화석 등도 거론했다. 법의학자나 해부학자가 아닌 사학과 출신으로 대학 시절인 1968년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발굴에 참여하고 미국 버클리대학에 유학하며 동물뼈와 사람뼈의 바다에 빠져 지낸 인물이었다. 박 선생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이후 7번을 더 만났다.
그렇게 ‘본헌터’는 A4-5와 충남 아산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또는 유족들 이야기를 씨줄로, 박 선생의 삶과 발굴 현장 이야기를 날줄로 꾸려졌다. 뭔가 다른 방식으로 전하고 싶어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고, 연재의 전개도 홀수회와 짝수회가 각각 독립적으로 진행되다가 끝에서 만나는 구조로 짜고,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번갈아 썼다. 극단 신세계 배우들 목소리로 ‘본헌터’를 들려주는 ‘오디오 본헌터’도 인터넷에 올렸다.
처음 6회 정도를 써놓고 시작했으나 이 연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었다. 계속할 수 있을지도…. “밤이면 밤마다 정체불명의 뼛조각을 땅에서 파내고 또 파내는 악몽에 시달렸다.” 이야기의 빈틈과 공백은 여러 증언과 자료집, 책을 찾아가며 메우고 채우면서 차츰차츰 실마리들이 풀렸다.
“한국전쟁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73년이 지났지만, 모르는 게 더 많아요. 저 역시 마찬가지죠.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보도를 하면서 20년 넘게 베트남 전쟁에 관심을 가졌으나 한국전쟁은 몰랐어요. 충남 아산에서만 부역 혐의로 최소 1000명 이상이 죽었어요. 그런 학살은 전국 곳곳에서 예외가 없었어요. 아직도 그 이야기를 숨겨두고 있는 사람들,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쓴 거는 한국전쟁의 아주 작은 챕터 하나일 뿐이죠.”
그는 올해로 한겨레에서 31년째 기자생활을 하고 있다. 1994년 한겨레21 창간팀에 합류해 한겨레21 편집장, 씨네21 편집장, 한겨레 생활문화섹션 ESC팀장, 토요판 에디터, 신문부문장, 출판국장, 22세기 미디어 대표, 이노베이션랩 실장 등을 지냈다. 그런 그가 작년 4월 초 사회부에 자원한 건 현장 기사를 쓰겠다는 생각에서다. 사회부에서 가장 사회부스럽지 않은 긴 호흡의 콘텐츠를 생산해보고 싶었다. 다짐과 달리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겁도 났고 스트레스도 적잖이 받았다.
‘본헌터’만 해도 쓰고 고치고 쓰고 했지만, 현장 기사는 바로 보고 바로 내야 했다. 연재를 이어가면서 사건팀 중부라인 2진을 맡아 출입처인 진실화해위에서 발생한 뉴스를 처리하고, 사건 풀기사도 썼다. 2주마다 열리는 진실화해위 전체회의는 빠지지 않고 찾았다. 기사는 안되더라도 현장에 가면 소득이 있었다. 공부도 되고, 사람도 알게 되고, 다른 사안으로 연결이 되거나 더러 자잘한 뉴스 속에 큰 뉴스가 숨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쓸모없는 삽질은 없다”고 했다. 지금은 국가인권위원회와 중부라인 전체를 맡고 있다.
참, 연재물 제목인 ‘본헌터’는 박선주 선생의 이메일 주소다. “뼈에 눈을 번뜩이는 사냥꾼이자 숨은 뼈를 찾아내는 사냥꾼, 그 뼈에 담긴 수수께끼를 푸는 사냥꾼이다.”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간 고경태의 ‘본헌터’는 1월 말 책으로 묶여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