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0명 희생된 1945년 우키시마호 비극을 인양하다

[인터뷰] '우키시마호 희생자 보도'
히라바루 나오코 서일본신문 기자
이승훈 부산일보 기자

일본 앞바다에서 한국인을 가득 태운 배가 침몰해 8000여명이 희생됐다면? 아마 역사에 길이 남을 대형 참사로 기록됐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똑같은 사고가 과거에 있었다. 바로 78년 전 일어난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다. 우키시마호는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22일,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그 가족을 태우고 일본에서 출발한 1호 귀국선이다. 애초 부산항이 목적지였지만 돌연 뱃머리를 돌려 일본 마이즈루항으로 향했고, 출항 사흘만인 8월24일 의문의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당시 사망자는 최대 8000여명. 그러나 시신은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고, 이후 진상조사 역시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는 그렇게 교과서에도 기록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히라바루 나오코(왼쪽 두 번째) 서일본신문 기자, 이승훈(왼쪽 세 번째) 부산일보 기자, 일본 시민단체 ‘마이즈루모임’ 회원들이 지난 9월 말 일본 마이즈루 우키시마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히라바루 나오코 제공


방치된 우키시마호가 다시금 조명을 받은 건 올해 2월. 당시 이승훈 부산일보 기자는 단독 기사를 통해 부산 금정구 영락공원 지하 무연고자실에 보관된 강제징용 희생자 유골 194구 중 최소 12구가 우키시마호 침몰 피해자임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히라바루 나오코 서일본신문 기자가 입수한 옛 오미나토 해군시설부의 우키시마호 희생자 명단과 영락공원의 명단을 대조한 결과였다. 서일본신문은 일본 후쿠오카에 본사를 둔 부산일보 자매지로, 2002년부터 매년 부산에 파견 기자를 두고 있다. 당시 파견 기자였던 히라바루 나오코 서일본신문 기자는 “규슈 지방을 거점으로 하는 서일본신문은 각지에 남아 있는 징용자 유골을 계속 취재해 왔다”며 “이번 보도는 양사가 취재해온 내용이 하나가 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첫 계기는 지난해 7월 서일본신문의 가네다 다이 기자의 보도였다. 당시 가네다 기자는 일본 기타큐슈시 ‘영생원’에 한국인 강제징용자의 유골이 있고, 유족을 찾고 있다는 기사를 부산일보에 냈다. 이 기사를 계기로 김마선 부산일보 정치부장이 영락공원도 알아보라 지시를 했고, 이승훈 기자는 바로 영락공원을 조사해 일제강점기 징용자 유골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의문인 것은 당시 유골 중 여자 이름이 있다는 거였다. 히라바루 기자는 “이 분들이 과연 누굴까,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골일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며 “그러다 지난해 12월, 일본 시민단체 ‘우키시마마루 순난자를 추모하는 모임’ 회장님이 저에게 한 파일을 주셨다. 그 안에 우키시마호 희생자 명단의 일부가 들어 있었고 이승훈 기자에게 연락해 둘이서 명단을 조합했다”고 말했다.


당시 보도는 사실상 국가도 손을 놓고 있던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골의 봉안 현황을 한·일 합동 취재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어서 의미가 컸다. 두 기자는 이를 토대로 잊힐 위기에 놓인 우키시마호를 다시금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마침 그 즈음 기획취재부로 발령난 이 기자가 6명 규모의 취재팀을 꾸리며 본격 취재가 시작됐다. 취재팀은 먼저 1995년 10월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가 작성한 생존자 81명의 개인기록부를 분석해 이들을 찾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이승훈 기자는 “사고 시점의 기억이 있으려면 적어도 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은 될 텐데 과연 살아계실지 의문이었다”며 “게다가 옛날 집 전화번호로 연락되는 이는 단 한 분밖에 없어서 28년 전 집 주소를 토대로 생존자를 찾아나서야 했다”고 말했다.


취재팀은 두 달여간 부산, 창원, 광주, 아산, 천안, 거창, 대구, 진주, 청양, 인천, 서울 등지를 돌며 생존자를 추적했다. 8월 중순엔 생존자와 유족을 찾는다는 공고까지 냈다. 하지만 그렇게 찾은 생존자는 단 3명. 유족도 20여명이 채 안됐다. 이 기자는 “인터뷰를 했을 때도 그분들은 거의 반포기 상태였다”며 “계속 외면당하다 보니 저희가 찾아갔을 때도 별 기대를 안 하셨다. 저희도 문제 해결에 대한 확답을 드리기보단 국가 차원의 유해 봉환 재추진, 역사 추모공원 조성이 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부산일보는 지난 8월부턴 기획보도를 통해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를 재조명했다. 한국과 일본을 아울러 생존자와 유족, 목격자를 인터뷰하고 이를 영상과 인터랙티브 페이지로도 기록했다. 서일본신문도 지면과 온라인을 통해 관련 기사를 게재했다. 처음엔 회의적이던 생존자와 유족,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관련 기사가 계속 나가자 매일 포털에 ‘우키시마호’를 검색하며 좋아했다. 지난 10월 취재팀이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과 안종필자유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할 때 제일 먼저 연락한 이 역시 유족들이다. 이 기자는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가 역사에 묻힐 정도의 상황에 왔다는 생각이 드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사고 자체가 젊은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이 알려지는 것”이라며 “당시 한국인 수천명이 수장됐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제1 목표는 우키시마호가 교과서에 등재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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