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해직언론인은 256명이 아니라 최소 2000명 이상

[기고]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송선태 위원장, 진상조사위)가 최근 ‘2023년 상반기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활동보고서’를 내고 올해 6월까지 조사 활동 사항을 밝혔다. 진상조사위는 21개 직권조사 사건과 138개의 신청사건 중 75건을 조사중에 있으며 59건을 검토하고 있다<2023년 9월20일>.

진상조사위원회는 계엄군과 합동수사본부 등의 가혹행위 등에 대한 여러 분야의 조사결과를 공개하면서 언론인 해직에 대해 “특정 정치인(김대중, 김영삼)과 가깝다거나 반정부, 제작거부 등을 이유로 해직된 언론인은 현재 256명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진상조사위원회는 이 같은 조사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언론인의 경우 기자협회 김태홍 회장을 포함한 간부들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 직전에 예비검속되거나 수배되었다가 검거·기소되면서 해직됐다. 이들은 ‘계엄사가 보도검열을 철폐하지 않을 경우 5월20일부터 신문, 방송, 통신 등 모든 언론이 전면 제작거부에 들어가기로 결의’하는 등 저항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된 1980년 7월 하순부터 본격적으로 언론인 정화과정이 시작됐고 보안사가 정화 대상 언론인 명단을 작성했다. 보안사는 제작거부, 반정부, 부조리 등 사유를 적시해 각 언론사에 명단을 보내면서, 언론사의 자체 정화 형식으로 해고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해직언론인 발표 문제 심각

진상조사위원회의 1980년 해직언론인에 대한 이 같은 발표는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법’에 따라 내년 1월1일부터 광주항쟁 유공자 심사 과정에서 주요 자료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대단히 문제가 심각하다.

1980년 언론인 해직은 전두환, 노태우가 5·18광주항쟁 과정에서 전국언론인들의 검열, 제작거부 투쟁에 놀라 전체 언론을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들기 위해 자행한 내란범죄의 하나로 대법원 판결에서 확정되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할 것이다. 당시 신군부는 조직적으로 정권찬탈을 위해 공작했으며 특히 신군부에 강하게 저항한 언론에 대해 아래와 같은 일련의 언론 전반에 대한 탄압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1979년 10월27일-계엄선포, 계엄포고 제1호 (언론, 출판, 보도 사전 검열) 및 계엄공고 제2호 (보도검열 요령)
△1980년 2월15일-계엄위원회 언론순화대책 논의
△1980년 5월17일-계엄포고 제10호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 기자협회 간부 연행
△1980년 6월9일-합동수사본부, 경향신문 기자 등 22명 포고령 및 반공법위반으로 연행
△1980년 6월-국가보위비상대책위 문교․공보분과위원회, ‘언론계 정화․정비계획’ 입안
△1980년 7월19일-KBS 1차 해직자 명단발표
△1980년 7월29~30일-한국신문협회, 한국방송협회 ‘언론 자율정화와 언론인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문’ 채택 이후 각 언론사별로 언론인 정화 명분으로 해직
△1980년 7월31일-문공부, 172개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 발표
△1980년 8월9일-문공부, 617개 출판사 등록 취소
△1980년 11월14일-한국신문협회, 한국방송협회의 ‘건전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 채택, 언론 통폐합 결의
△1980년 12월31일-국가보위입법회의 언론기본법 제정

위에서와 같이 신군부는 광주항쟁 뒤 △1980년 7월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와 폐간조치를 내려 수백 종의 월간지 등의 발행을 중단시키고 △대중매체 언론사 전체를 상대로 일괄사표를 강요한 뒤 언론인 1000여명을 불법 해직시켰다. 또한 △언론사 통폐합조치를 취해 전국 수십 개의 신문 방송사를 없애면서 300여명의 언론인들이 직장에서 쫓겨나야 했고 △언론사를 장악하기 위해 언론악법인 언론기본법을 만들어 신문, 방송을 정부의 나팔수로 전락시켰고 △정보부, 행정기관 등을 동원해 보도지침을 만들어 언론보도를 철저히 통제했다.

진상조사위의 ‘해직언론인 256명’은 검열, 제작거부 투쟁에 국한한 것으로 매우 부적절하다. 당시 보안사가 해직사유로 적시한 제작거부, 반정부, 부조리 등은 신군부가 자의적 또는 악의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재판 등을 통해 확정된 것이 아니다. 이는 신군부가 이른바 ‘언론 정화계획’을 세울 때 해직언론인들의 단결이나 단합된 투쟁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장치한 정치공작의 하나일 뿐이다. 이는 문공부에서 1980년 9월경 작성한 <정화 언론인 취업문제>라는 문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문공부는 해직 언론인에 대한 취업을 제한할 시
-대부분이 의식분자이며, 부유하지 않은 실정으로 제작시 반정부 불평 집단화할 것임
-동아, 조선투위와 같이 집단행동을 벌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안정되고 있는 기존 언론인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며, 내외 언론에 부정적 요인이 될 것임
-소수의 반체제 분자 이외 언론 이외 분야의 취업을 막아야 할 이유와 명분이 희박함

위에서 동아·조선투위를 거론한 것은 80년 해직언론인의 해직 사유를 다양하게 해서 ‘모래알 집단’을 만들 경우 집단행동이 저지될 것이라는 저의가 있었다. 이런 공작은 흔히 독재정권에서 써먹는 수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광주항쟁과 관련해 해직된 언론인은 강제해직은 물론 정기간행물, 출판물 등록 취소와 언론사 통폐합 등의 불법 조치에 희생된 언론인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며, 전체 숫자는 최소 2000명 이상이라 할 것이다. 정확한 숫자가 집계되지 못한 것은 광주항쟁 관련 언론학살에 대한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상조사위원회가 제시한 ‘해직언론인 256명’은 보안사의 언론인 불법 사찰 자료를 주요 근거로 삼아 10여 년 전에 만들어진 행정부 측 자료를 제시한 것인데 이는 내란범죄자들이 언론인 불법 해직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만든 범죄 자료를 활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타당성이 전무하다.

5·17, 5·18 내란죄 사건 중 언론학살에 대한 공소장과 법원 판결문 내용

80년 언론인 학살의 진상은 문민정부 들어 전두환, 노태우의 내란죄 수사를 담당한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가 1996년 1월24일 전두환, 정호용 등 11명의 내란수괴에 대한 혐의사실을 발표하면서 드러났다. <5·17, 5·18 관련 사건 공소장>에서 80년 언론인 대량 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집권계획 일환으로 자행된 내란의 주요 과정이었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검찰이 언론학살을 자행한 범죄인으로 지목한 사람은 전두환, 노태우, 허삼수, 허화평 등 4명이다.

1) 언론학살 주범에 대한 1, 2심 공소장과 판결문 내용

전두환·노태우 등의 내란죄에 대한 1996년 8월26일의 1심 및 그해 12월 17일의 2심 판결문에서 80년 언론학살은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내란 과정에서 이뤄진 불법 행위라는 것이 밝혀졌다. 검찰의 언론학살 수사결과는 1, 2심 재판을 통해 대부분 사실로 인정되었고, 전·노씨가 상고를 포기함에 따라 항소심 판결문에 적시된 범죄 사실은 최종적인 사법적 판단이 되었다. 공소장과 판결문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피고인 전두환은 1980년 6월경 허문도 문교공보분과위원 등이 언론사 통폐합 방안, 언론인 정화계획, 언론관계법 제정 등을 내용으로 작성한 ‘언론계의 정화-정비계획’을 보고받고 그 전면 시행은 보류한 상태에서 문교공보분과위원회를 통해 ‘언론계 자체 정화계획’을 수립하게 하여 1980년 7월24일경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전달되도록 하고 1980년 7월30일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언론 자율정화 및 언론인 자질 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하게 하여 자율정화 형식을 취한 후 7월말경 이상재 언론대책반장이 작성한 보도검열 비협조자 등 언론계 해직 대상자 336명의 명단을 이광표 장관을 통해 해당 언론사에 통보, 각 언론사에서 대상자들의 사직을 종용하여 이들을 포함한 933명이 1980년 10월까지 소속 언론사들로부터 해직하게 하고….”

“1980년 10월 초순경 보안사 이상재 언론대책반장이 허문도 정무제1비서관의 검토자료를 토대로 자율 결정의 형식에 의한 언론통폐합을 내용으로 하는 ‘언론 건전육성 종합방안 보고서’를 작성하자 피고인 전두환·노태우는 허화평·허삼수와 함께 10월 중순경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김경원 비서실장,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 우병규 정무제1수석비서관, 이웅희 공보수석비서관, 허문도 정무제1비서관이 참석한 가운데 권정달로부터 이를 보고받았으나 김경원 비서실장, 이웅희 공보수석비서관들의 반대로 그 추진을 보류하였다가, 그 무렵 허화평·허삼수는 다시 허문도로부터 언론통폐합의 필요성에 대해 수차례 설명을 듣고 이에 동조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그 실행을 결심하여 허문도로 하여금 ‘언론 창달계획’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만들게 한 다음 11월12일 이광표 장관이 문화공보부의 결재안으로 가져오자 이를 결재하여 피고인 노태우에게 전달하게 하고, 그 집행을 의뢰받은 피고인 노태우는 16시경 한용원 정보처장과 김충우 대공처장에게 언론사 사주들을 불러 신속히 처리하되 그 집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여 18시경 중앙 언론사 사주들은 보안사 대공처가, 지방 언론사 사주들은 정보처 주관하에 지방의 각 지역보안부대가 소환하여 통폐합 조치에 이의가 없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고 이에 따라 지방지를 1도1사 원칙에 따라 10개로 통합하고 공·민영 방송구조를 공영방송 체제로 개편하는 등 신문 28개, 방송 29개, 통신 7개 등 64개 매체를 신문 14개, 방송 3개, 통신 1개 등 18개 매체로 통폐합하고 이 과정에서 305명의 언론인이 추가로 해직되도록 하면서 이를 자율 추진 형식으로 하기 위해 허문도·이수정 비서관으로 하여금 자율 결의문과 홍보문을 작성하게 하여 이를 허만일 문화공보부 공보국장에게 전달, 11월14일 신문협회로 하여금 ‘건전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를 하게 하는 등 일방적으로 언론기관 통폐합 방안을 마련한 후 군 정보수사기관을 동원해 이를 실행하고….”


2) 전두환 등에 대한 대법원 판결 내용

신군부의 80년 언론폭거에 대한 역사적 범죄 사실은 1997년 4월17일 전두환, 노태우와 관련한 12·12와 5·18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을 통해 역사적 범죄로 확정되었다. 12·12와 5·18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전두환은 국군 보안사령관으로서, 1980년 허문도 국보위 문교공보분과위원 등이 언론사 강제해직, 언론사 통폐합 등을 내용으로 작성한 ‘언론계의 정화, 정비계획’을 보고 받는다.

전두환은 이어 국보위 문교공보분과위를 통해 ‘언론계 자율정화계획’을 수립케 해 같은 해 7월 이광표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전달되도록 했다. 이어 같은 해 7월30일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언론자율 정화 및 언론인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케 하여 자율정화 형식을 취한다. 그 뒤 이상재 당시 보안사 언론대책반장이 작성한 보도검열 비협조자 등 언론계 해직대상자 336명의 명단을 이광표 장관을 통해 해당 언론사에 통보, 각 언론사에서 해직대상 언론인들의 사직을 종용해 10월까지 소속 언론사로부터 해직되게 했다.

국방부, 진실화해위의 언론학살 진상 규명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사건이 신군부의 불법행위라는 것은 1988년 국회 청문회 및 1997년 전두환, 노태우 등의 내란음모 사건 조사과정에서 그 사실관계가 일부분 밝혀졌고, 대법원이 이를 내란죄의 일부로 판단한 바 있다. 또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7년 10월 1980년 언론사 통폐합 및 언론인 강제해직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결과를 발표해 그 전모가 밝혀졌다.

이후 국가공식기구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2010년 1월7일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 및 언론사 통폐합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1980년 11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결재한 보안사에 언론통폐합을 일임한다는 내용의 언론창달계획 최종결재안. 진실화해위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는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 언론통폐합 조치 및 정기간행물 및 출판사의 등록취소 조치에 대해 공권력을 이용하여 강압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책임을 인정하고, 관련 피해자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 국가는 이 사건의 신청인들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권고했다<진실화해위의 80년 언론인 불법 해직 관련 결정문>.

참고로 이상과 같은 결정이 내려지게 된 1980년 언론학살에 대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관련 자료 내용은 아래와 같다.

신군부는 1979년 12․12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1980년 3월 언론대책반을 통해 K-공작계획을 입안하고, 언론계 인사들의 성향을 분석(양호, 협조희망, 적극, 경계, 소극 및 3김에 대한 지지성향)하여 언론사주 및 언론사 간부들과 면담을 추진하여 신군부에 협조하도록 회유하였고, 언론보도에 대하여 총 108만3696건을 사전 검열하고 2만9010건을 보도 관제하는 등 언론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에 언론계는 신군부의 조치에 대항하여 1980년 2월20일 경향신문을 시작으로 각 언론사 별로 1980년 5월20일까지 ‘언론검열 철폐와 자유언론실천 결의문’을 채택하는 등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한국기자협회는 1980년 5월16일 검열거부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5월20일부터 검열을 거부하는 제작거부에 돌입한다고 선언하였다.

신군부는 언론계의 언론검열철폐와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예의주시하면서 보안사 요원들로 하여금 언론인과 언론기관의 동정을 살피고 언론의 논조 및 언론인에 대한 비리조사에 착수하였다. 1980년 5월 자유언론실천운동이 확산되자 신군부는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함께 발동한 포고령 10호를 명분으로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는 기자들을 유언비어 유포 및 내란 음모 등의 혐의로 구속․해직시켰으며,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광주시민을 폭도로 보도하도록 지시하면서 보도를 통제하였다.

신군부는 제작거부 등 언론계가 조직적으로 저항하자 보안사 요원들을 통해 해직대상자를 선정하여 명단을 작성하였는데, 언론기자들을 A(국시부정자), B(제작거부), C(단순 제작 거부, 부조리 행위자, 자체 정화자)로 구분한 후, 이를 문화공보부가 언론사의 자율결의 형식으로 집행하도록 하여 933명 이상의 언론인을 해직하도록 하였고, 해직된 언론인의 취업을 제한하거나 불허하고, 해직언론인의 동향을 파악하여 동향 내용에 따라 A, B, C, D 등급으로 구분해 수시로 등급을 조정하였다.

신군부는 1980년 8월 언론인 대량해직에 이어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 시 언론사 임직원들은 고용승계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수시로 언론인을 해직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방법으로 약 305명 이상의 언론인을 추가로 해직하였다.

80년 언론투쟁 40여년만에 광주항쟁의 일부로 공인돼

80년 언론인 강제해직은 17년 만에 최고법원에 의해 신군부가 내란의 한 과정으로 저지른 범죄행위로 규정되어 해직언론인 명예회복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대법원은 1997년 초 전두환 노태우 등에 대한 12·12와 5·18재판의 판결을 통해 언론학살의 불법성을 확정지었다. 그후 해직기자들은 그 후 행정심판 청구, 국가배상 청구 등을 통해 실질적인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을 벌이지만 정부의 반개혁성에 의해 다 좌절되었다. 광주특별법 제정 당시 80년 해직기자들도 보상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 또한 실현되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 들어 80년해직언론인배상특별법이 추진되었지만 IMF 재정난 등을 이유로 폐기되었다.

이후 80년 해직언론인들은 2000년 제정된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에관한법률에 따라민주화보상특별법을 통해 현재 약 300여명이 민주화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법은 민주화관련자로 인정하는 외에 아무런 보상 등이 없어 너무 허술하다는 비판에 직면해 2004년 개정되어 해직언론인들에 대한 복직권유조항이 추가되었다.

국회에서 80년 언론인 투쟁에 대한 특별법이 2010년, 2015년, 2016년 각각 제출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하다가 2021년 5월21일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의원이 대표 발의한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과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면서 광주항쟁과 언론항쟁을 분리시키고 광주항쟁을 지역항쟁으로 조작하려던 공작이 41년 만에 격파된 쾌거였다.

해직자 생존권 위협한 취업제한 및 동향파악

신군부의 1980년 투쟁언론인에 대한 보복조치는 생존권을 위협하는 극악한 수준이었으며 그 주요 내용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가. 해직언론인 취업제한 조치

보안사는 강제 해직된 언론인의 취업을 제한하기 위하여 ‘총무처 비위관련 공직자 취업제한 기준에 준하여 형평을 유지하기 위한 취업제한’이라는 명분으로 <정화언론인 취업허용 제한기준>을 만들었다. 해직언론인은 공무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총무처 비위관계 공직자 취업제한 규정을 적용하였고, 언론사 및 관계단체, 공무원, 국영업체, 정부투자 및 출자법인과 단체에 취업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사기업의 홍보 및 광고 담당 요원까지를 해직언론인의 취업을 제한하였다.

위 문서에 의한 취업 제한기간 및 ‘국시부정 및 반정부’를 이유로 한 영구 취업불허자는 다음과 같다.

국방부과거사위의 ‘신군부의 언론통제시간’ 조사결과 보고서 중 취업이 제한된 해직자명단


이후 보안사는 1980년 9월15일 정화언론인 711명 중 국시부정 및 극렬 반정부자 28명을 제외한 인원에 대하여 1차 순화시킨 후, 타업종 취업을 허용할 수 있도록 노태우 사령관에게 건의하여 결재를 받았고, 같은 달 30일 13명을 영구취업제한하고 나머지 인원은 취업을 허용할 수 있도록 △A(국시부정행위자, 13명, 영구) △B(제작거부 주동 및 선동자, 96명, 1년) △C(단순제작거부 동조자 602명, 6개월)로 나눠 다시 결재를 받았다.

보안사의 <정화언론인 취업허용건의>에서는 취업을 허용할 경우 장점으로 급수에 따라 반성개전의 정이 있는 자에 대하여 국가발전에 기여 기회 부여할 수 있고, 비위공직자와 동일조건으로 취업요건을 완화함으로써 신분상 공무원과 준한다는 의식을 심어주고, 형평성을 유지하며, 반성자에게 취업기회를 부여하여 불평불만자의 집단화를 방지할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허용업종 취업자는 퇴직사의 재직증명발급 시 자연스럽게 각서 받고 이를 문공부에 제출케 하여 간접적으로 순화효과를 기하고 취업허용을 구실로 다시 한번 언론인들을 정부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였다.

한편, 1980년 7월1일 이후 언론정화조치대상자에 포함된 자 및 정화조치대상자에서 제외되었거나 누락된 자로서 입건, 수사 또는 재판에 계류 중인 자와 수사종결(기소유예처분) 또는 형이 확정된 자에 대해서도 추가적으로 취업이 제한되는 조치를 취하였다.

80년 언론투쟁을 기자의 날로 제정한 역사적 의미

한국기자협회는 지난 2006년, 5월 항쟁 기간 언론인들의 신군부에 대한 투쟁을 기리기 위해 5월20일을 ‘기자의 날’로 제정하여 5·18기념재단과 토론회 등 공동행사를 진행하면서 5·18언론상을 후원하고 있다. 기자협회가 80년 언론인 투쟁을 기자의 날로 기리려 한 것은 80년 언론인 투쟁이 한국 언론 정사에 가장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자협회에서 5월 20일을 기자의 날을 제정한 것은 의미가 크다. 우선 그것은 역사바로잡기라 하겠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신군부에게 맨 손으로 투쟁한 역사적 사실을 26년 만에 언론의 정사(正史)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것이다.

한국 언론은 정부 수립 이후 군사정권이 종식될 때까지 정치권력의 폭력적인 통제의 대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언론인 불법해직이 수시로 자행되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동아·조선 언론인 불법해직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가 언론인 불법해직에다 언론사 통폐합까지 자행하면서 그 폐해와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언론인 불법해직은 정치권력이 언론계 전체를 겁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어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도 반복되었다.

80년 언론인 투쟁이 광주항쟁의 일부로 법에 의해 공인되는 작업이 41년이나 걸린 것은 전두환 등이 자행한 정치공작의 독기가 얼마나 지독한지를 입증한 사례의 하나다. 정치군인들이 내란 과정에서 자의적으로 만들어놓은 일부 해직언론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해직 사유가 민주화 운동 인정이나 국회 입법 과정 등에서 활용된 것에 대해 문제 제기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는 정치군인들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갇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역사적 범죄에 대해 풀어야 과제가 여전히 산적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또한 1980년 당시 전두환의 내란 과정에서 자행된 언론사 통폐합과 그 과정에서 직장을 잃은 언론인에 대한 언론계 또는 정치사회적 관심은 찾아보기 힘들고 75년 동아·조선투위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전두환 일당이 범죄 사실에 대해 반성, 사과조차 없었다는 점은 이 사회의 일각에서 암약하고 있는 반민주적 적폐세력이 여전하다는 반증의 하나다.

광주항쟁기간 동안 광주 일원을 제외하고 신군부에 저항한 세력은 언론계가 유일했다. 광주시민이 온몸으로 신군부의 폭거에 맞설 때 기자들은 펜을 놓고 광주시민과 뜻을 같이 했다. 그 때문에 광주를 점령한 신군부의 언론탄압도 자심했고 여전히 그 진상규명 등이 미흡한 실정이다. 진상조사위는 이런 사실을 직시하면서 군부독재가 만들어놓은 뒤 방치된 80년 언론학살의 진상 규명, 명예회복과 함께 반민주적 세력이 획책하는 적폐 청산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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