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남성' 가해자들

[이슈 인사이드 | 젠더]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

또 여성이 죽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발생한 성폭행 살인 이야기다. 피의자인 30대 남성 최윤종은 금속 흉기를 손에 착용해 피해자에 휘둘렀다. 대낮 서울 도심에서 발생한 흉악범죄에 시민들은 경악했다. 22세 남성 최원종은 지난달 분당 서현역에서 흉기난동을 벌여 14명의 사상자를 냈다. 33세 남성 조선은 7월 서울 신림역 번화가에서 1명을 살해했다.


‘여자라서 죽었다’라는 말은 꺼내지 않을 것이다. 신림동 성폭행 피해자는 여성이었으나, 다른 두 사건의 피해자는 무차별적이었다. 길을 걷다 아무 이유 없이 이상범죄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한동안 남성 사이에서 ‘호신용품 구매 행렬’이 이어질 정도였다. 통제되지 않고 폭주하는 공격성은 어디든 향할 수 있다. 말 못하는 동물, 미성년자, 노인, 혹은 길 위의 불특정 ‘행복해 보이는 사람’까지.


‘여자라서 죽은 것’이 아니라 ‘남자라서 죽인 것’이다. “남성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것이냐!” 개별 남성을 향한 공격으로 오독한 분노가 건설적 논의를 가로막기 전, 통계부터 직시하자. 검찰청의 ‘범죄분석통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살인 범죄자 772명 중 581명(75.2%)이 남성이었다. 전체 성폭력 범죄자 3만1651명 중 남성은 3만239명(95%)이었다. 분명히 존재하는 강력범죄 가해의 성차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올여름은 유난히 흉흉했다. 신림역 흉기난동을 모방한 살인예고글이 범람했다. 경찰청은 지난달 31일 기준 살인예고글 487건 수사에 착수했고, 그중 피의자 241명(236건)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초반엔 미성년자 여부 등을 함께 발표했으나 성별은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젠더 갈등을 양산할 수도 있다’는 경찰 내부 분위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제부터 수사기관이 사회 갈등까지 도맡았나.


젊은 남성의 사회적 좌절감이 유독 타인을 향한 공격성으로 분출되는 현상을 논의할 때, 성별은 유의미한 요소다. 한국보다 앞서 무차별 살상 사건이 사회 문제로 대두된 일본에서도 가해자는 대부분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39세 이하 남성이었다(일본 법무성). 다수가 불편할 수 있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불행한 처지에 놓인 남성들을 자유롭게 하는 더 나은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같은 어려움을 겪는 여성에 비해 남성들의 공격성은 왜 외부로 향하는가’ ‘사회는 젊은 남성에 무엇을 요구하는가’ ‘남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규범은 아직 유효한가’ 등.


젠더 편향적 데이터가 어떻게 세계를 왜곡하는지를 고찰한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스웨덴에서 30년간 일어난 살인 사건을 분석해 보니 10건 중 9건의 범인은 남자였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의 통계와도 궤를 같이한다. 2013년 국제연합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살인자의 96%는 남자였다. 그렇다면 살인 본능을 가진 것은 인간인가 남자인가?”


그렇다면 언론은 가해자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호명하고 있을까. 다음은 최근 잇따른 살인예고 관련 여러 매체가 출고한 기사의 실제 제목들이다. ①“잘 사는 국회의원들 죽이겠다” 살인예고글 쓴 30대 회사원 ②주식 투자 실패로 칼부림 예고 20대 재판행 ③‘서울 모든 역이 목표’ 살인예고글 올린 20대 구속 ④“팬심 안 받아줘서” 유명 연예기획사 대상 살인예고 20대 구속 ⑤“서현역에서 한남 찌르겠다” 30대 여성 구속기소.


명시적으로 피의자가 ‘여성’임을 밝힌 ⑤번 사건을 제외한 4건의 범인은 모두 남성이다. 이런 성차별적 보도 관행은 현실의 어떤 면을 과장하고, 어떤 면을 가리는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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