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DDT·BPA, 그리고 후쿠시마원전 오염수

[이슈 인사이드 | 환경] 김기범 경향신문 기자

김기범 경향신문 기자

1980년대 후반부터 많은 주유소에서 사용하기 시작해 현재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단어가 있다. 주유해본 이들 누구나 본 적이 있을 이 단어는 바로 유해 중금속 ‘납’이 함유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무연 휘발유’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무연 휘발유 사용이 확대됐고, 1993년부터는 납이 포함된 ‘유연 휘발유’가 전면 금지됐다. 대기, 식품 등에 존재하는 납이 인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연구 결과들이 꾸준히 축적되어온 영향이었다.


극히 적은 양에만 노출되어도 정신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포함해 과학자들은 납이란 물질에는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노출 기준치를 두기 어렵다는 사실을 밝혀내 왔다. 덕분에 한국을 포함한 대다수 나라들은 식품이나 공산품 등에서 기준치를 꾸준히 강화하고 있다. 납이 아예 없는 환경을 만들지 못하지만 기준치를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강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납 외에도 과거에는 기준치가 높았지만 과학이 발달한 덕분에 현재는 매우 낮은 기준치를 적용하고 있거나, 독성이 확인되지 않아 널리 사용했지만 현재는 사용이 금지된 물질들이 다수 존재한다. 과거 한국에서도 해충 박멸 용도로 널리 사용된 DDT가 맹독성 물질이라는 점이 뒤늦게 확인되면서 생산마저 금지한 게 대표적 사례다.


전염병, 해충 피해 등을 막기 위해 병사들, 어린이들 온몸에 DDT를 뿌리는 모습이 담긴 과거 사진들은 DDT의 독성을 아는 현재의 사람들에게는 끔찍하게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과거 독성에 대해 모르던 이들은 DDT를 뿌려주고, 맞으면서 긍정적인 효과만을 기대했을 것도 사실이다.


뿐만아니라 우리 주변 환경은 물론 체내에도 존재하는 물질에 대한 상식이 뒤집힌 경우도 있다. 흔히 환경호르몬이라고 불리는 비스페놀A(BPA)의 경우 적은 농도에서는 인체 악영향을 일으키지만 높은 농도에서는 영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플라스틱 제품이나 영수증 등에 포함된 BPA가 내분비계교란물질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고, 자사 제품이 BPA가 포함되지 않은 ‘BPA 프리’ 제품이라고 홍보하는 업체도 있지만 BPA 농도와 영향이 선형 관계가 아닌 비선형 관계라는 사실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기준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물질도 있음을 나타낸다.


납과 DDT, BPA 등 과거와 현재의 기준치, 독성에 대한 지식이 다른 물질들에 대해 길게 설명해 놓은 것은 현재 정부나 일부 과학자들이 후쿠시마원전의 방사성 오염수나 전자파 등 시민들이 건강 악영향에 대해 우려하는 대상들에 대해 보이는 태도 때문이다. 특히 정부는 과학적 연구결과가 축적되면 기준치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한 채 기준치보다 낮으니 문제가 없다는 태도로만 일관한다.


하지만 납과 DDT, BPA의 사례에서 보듯 기준치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며, 당대 과학기술 수준과 사회적 합의에 따라 임의로 정해진 수치일 뿐이다. 특히 저농도 방사성 물질의 인체·생태계 장기간 노출이나 전자파처럼 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경우 기준치보다 낮아 안전하다고 강변하는 것은 시민들을 안심시키지 못하는, 공허한 주장일뿐이다.


정부 브리핑이나 설명자료에서 “기준치보다 낮지만 인체·생태계에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존재하므로 오염수 방류에 반대 입장을 견지할 것입니다”, “기준치보다 낮지만 과학적 불확실성이 존재하므로, 주의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처럼 상식적 내용이 들어가는 날이 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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