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앉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아주 오래된 이 가요를 요즘 자주 흥얼거린다. 오는 9월1일 출범할 어떤 노동인권단체를 함께 준비하고 있어서다.
이 단체에 모이게 될 이들은 각자 하는 업무와 일하는 장소가 다르고, 좀처럼 한자리에 모이기도 쉽지 않다. 노동조건도 천차만별이다. 다만 이들은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그리고 방송 제작 현장에서 수시로 맞닥뜨린 억압과 차별, 부당한 현실을 더디더라도 바로잡겠다는 하나의 목표 아래 뭉쳤다.
이 단체 이름은 ‘방송을 만드는 이들의 이름_엔딩 크레딧’. ‘엔딩 크레딧’은 영화가 상영된 후 마지막에 주연배우부터 참여한 모든 제작진의 이름을 담아 스크린에 띄우는 자막이다. ‘연극이 끝난 후’의 가사처럼 무대의 불빛은 ‘배우를 따라 바삐 돌아간다.’ 영화처럼 방송 프로그램도 일종의 종합예술 작품이지만 언제나 드러나는 것은 출연자들과 PD 등이다. 다만 방송 프로그램 제작진들에게는 주목받지 못한다는 ‘고독감’을 넘어 일상을 위협하는 ‘조건’이 있다. 대다수가 비정규직이기에 언제 엔딩 크레딧에서 삭제될지 모른다는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또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정규직들에 비해 너무도 뚜렷한 노동조건의 ‘차별’을 감내한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최근 발간한 ‘방송사 비정규직 근로여건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지상파 방송사들에 입사하는 노동자들의 60%가 비정규직이다. ‘프리랜서’, ‘파견’, ‘기간제’ 등 고용 형태도 다양해 ‘방송국=비정규직 백화점’이라고 불릴 정도다. 방송 프로그램 제작업의 특성상 그 현장에서 유기적으로 협업하는 이들은 독립 사업자로서 일할 수 없음에도 ‘프리랜서’로 취급당해왔다. 2년 이상 지속될 상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파견 노동자’라는 이유로 근속기간은 최대 2년만 보장됐다.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비정규직의 비중이 큰 일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언론은 이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다. 비정규직 문제를 꾸준히 뉴스로 다루면서도 정작 자신이 몸담은 업종에서 벌어진 문제를 비판하는 데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방송사들의 비정규직 남용과 사회적인 무관심 속에서 최근 수년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스스로 법률 대응을 비롯한 다양한 저항을 끈질기게 이어왔다. 그리고 그 결과 이제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싸움의 당사자들’이 다수 존재한다. 또한 그들과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기존에도 방송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연대하는 노동조합, 단체, 법률가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 과정에서 항상 직접 현장을 바꿔야 할 ‘당사자들’의 역할이 아쉬웠다. ‘엔딩크레딧’은 방송 제작 현장의 다양한 직종간 차별을 넘어, 연대하는 활동가, 직접 ‘방송을 만드는 이들’이 주체가 되는 단체를 지향한다.
9월1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는 지상파 방송사 간부들과 관계 부처 공무원 등이 한자리에 모여 ‘방송의 날’ 기념식을 개최한다. ‘엔딩 크레딧’ 역시 이날 별도의 출범식을 통해 ‘우리가 방송을 만드는 주류(mainstream)’라고 공식 선포할 것이다.
이들의 시작이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방송 제작 현장의 불합리하고 부당하고, 불법적인 비정상을 끝내는 ‘엔딩’이 되길 바라본다. 그리고 언론이 이 소중한 첫걸음에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선명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