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해직언론인 '광주 유공자' 신청 길 열렸지만…

[기고]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신군부의 시민학생 학살만행에 항거해 검열·제작거부를 감행했다 불법해직됐던 ‘80년 해직언론인’들이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법’에 따라 지난 3일부터 ‘광주 유공자’ 신청을 하고 있다.

80년 언론인 불법해직은 광주항쟁 당시 광주·전남 일원을 제외하고 전국 신문·방송·통신사 소속 언론인들이 유일하게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 폭거에 항거한 뒤 정기간행물 폐간, 언론사통폐합 조치와 함께 취한 신군부의 총체적인 언론학살의 한 부분으로 자행됐다.

전두환 신군부가 보도 불가로 판정한 광주항쟁 당시 현장 사진들.

5·18 항쟁 당시 신문·방송·통신사 다수 언론인들이 ‘광주’에 대한 사실 및 진실보도를 주장하며 검열, 제작 거부투쟁을 벌였다. 그런 언론인 집단 항거가 가능했던 것은 1979년 10·26 이후 한국기자협회(당시 회장 김태홍)를 중심으로 언론자유 쟁취, 검열철폐, 유신언론인 청산 운동을 활발히 벌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광주항쟁 발생 직후 전국의 언론사 기자들이 편집국 총회와 전체 사원 표결 등의 절차를 거쳐 검열 및 제작거부에 돌입했고 신군부는 노골적으로 협박에 나섰다.

전두환, 제작거부 중단 강요하며 ‘각오하라’ 협박

전두환은 1980년 5월20일 이후 직접 두 차례에 걸쳐 언론사 사장 등을 모아놓고 ‘검열제작거부를 즉각 중단시키지 않으면 각오하라’고 협박하고 일부 언론사 앞에 장갑차와 무장군인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겁박했다. 그러나 언론인들은 ‘외신에 다 보도되어 세계가 지켜보는 광주학살을 정작 국내에서 보도 통제하는 것은 천만부당하다’고 주장하며 광주가 함락될 때까지 항거를 지속했다.

전국 언론사 내부에서 광주와 함께 투쟁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대중매체들은 신군부의 계엄사 검열조치에 따라 광주를 폭도의 도시로 모는 허위뉴스를 보도할 것을 강요당했고 이 때문에 광주지역 일부 방송사가 불타기도 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를 유혈제압한 뒤 정권찬탈을 음모하고 그 구체적인 작업을 강행했는데 그 일차적 대상은 광주항쟁 기간 신군부에 조직적으로 저항한 언론인을 표적으로 삼았다. 자신들에게 저항한 언론인들을 그대로 놓아두어서는 정치공작, 정권찬탈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내린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신군부는 △1980년 7월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와 폐간조치를 내려 수백 종의 월간지 등의 발행을 중단시키고 △대중매체 언론사 전체를 상대로 일괄사표를 강요한 뒤 언론인 1000여명을 불법 해직시켰다. 또한 △언론사 통폐합조치를 취해 전국 수십 개의 신문 방송사를 없애면서 300여명의 언론인들이 직장에서 쫓겨나야 했고 △언론사를 장악하기 위해 언론악법인 언론기본법을 만들어 신문, 방송을 정부의 나팔수로 전락시켰고 △정보부, 행정기관 등을 동원해 보도지침을 만들어 언론보도를 철저히 통제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 전반에 걸친 야만적인 폭거는 정부수립 이후 국내 언론에 가해진 최악, 최대의 언론탄압이었다. 당시 신군부 보안사 등은 해직언론인들에 폐간과 자율정화, 언론사 통폐합과 같은 정치공작적인 구실을 앞세워 2000명 가까이 현직에서 몰아냈다. 신군부는 이와 함께 해직언론인들의 해직 사유를 자의적으로 국시부정, 반정부, 검열과 제작거부 등의 사유를 개별적으로 적어 넣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전국 관공서에 배포해 최고 영구 취업금지 조치까지 자행했다. 이는 생존권 자체를 위협하는 살인적 만행이었다.

80년 언론인 학살의 진상은 문민정부 들어 전두환, 노태우의 내란죄 수사를 담당한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가 1996년 1월24일 전두환, 정호용 등 11명의 내란수괴에 대한 혐의사실을 발표하면서 드러났다. ‘5·17, 5·18 관련사건 공소장’에서 80년 언론인 대량 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집권계획 일환으로 자행된 내란의 주요 과정이었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검찰이 언론학살을 자행한 범죄인으로 지목한 사람은 전두환, 노태우, 허삼수, 허화평 등 4명이다.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사건이 신군부의 불법행위라는 것은 1988년 국회 청문회 및 1997년 전두환, 노태우 등의 내란음모 사건 조사과정에서 그 사실관계가 일부분 밝혀졌고, 대법원이 이를 내란죄 일부로 판결한 바 있다. 또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7년 10월, 국가공식기구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10년 1월 각각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결과를 발표해 그 전모가 밝혀졌다.

광주항쟁 기간 신군부의 민간인 학살에 저항한 세력은 광주 일원의 시민을 제외하고 전국 대부분 언론사의 언론인이 유일했다. 그러나 광주 항쟁 관련 특별법인 5·18 보상법을 만들 1997년 80년 해직언론인들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언론인 항쟁은 제외됐다.

80년 언론투쟁 40여년만에 광주항쟁 일부로 공인돼

국회에서 80년 언론인 투쟁에 대한 특별법이 2010년, 2015년, 2016년 각각 제출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하다가 2021년 5월21일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의원(광주 광산구을)이 대표 발의한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과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면서 광주항쟁과 언론항쟁을 분리시키고 광주항쟁을 지역항쟁으로 조작하려던 공작이 41년 만에 격파된 쾌거였다.

이로써 이들 두 법률에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로 1980년 강제 해직된 언론인이 포함돼 광주항쟁과 관련해 41년간 왜곡됐던 역사 하나가 바로잡혔다. 그러나 관련법 시행 일자가 잘못 기재되면서 별도의 국회 통과절차를 거치는데 1년이 걸렸고 그 시행령이 지난 1일부터 시행되게 이른 것이다.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부마항쟁, 민주화관련자 법 등에는 해직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유독 5·18 보상법에만 빠져있었고 그것이 정상화되는데 41년이 넘게 걸렸다. 80년 언론인 투쟁이 광주항쟁의 일부임에도 광주항쟁에서 제외한 것은 광주항쟁을 지역적인 문제로 국한하려는 신군부와 그들에게 동조적인 정치권이나 공범 역할을 했던 일부 언론사 고위층 등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행위였다.

신군부에 의해 학살당한 해직 언론인을 5·18 관련자로 포함시키는 것은 역사바로잡기의 일환으로 ‘광주 정신’을 부정하는 일부 세력의 왜곡과 폄훼에 맞서고 5·18의 전국화 실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이를 위해 한국기자협회와 5·18기념재단은 광주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위해 공동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MOU를 지난 2021년 작성한 바 있다.

지난 2006년 당시 한국기자협회(정일용 회장)는 1980년 언론인 투쟁이 시작된 날인 5월20일을 기자의 날로 선포하면서 언론계에서는 20여 년 만에 언론의 역사바로잡기가 이뤄졌었다. 기자협회가 80년 언론인 투쟁을 기자의 날로 기리려 한 것은 80년 언론인 투쟁이 한국 언론 정사에 가장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자의 날’ 기념은 1980년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전국의 기자들이 신군부의 광주 살육만행에 저항해 검열과 제작거부 투쟁을 벌인 일을 후배 기자들이 잊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80년 당시 기자들이 신군부에 저항한 것은 그 이전 1975년 동아·조선투위 투쟁, 1961년 민족일보의 수난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물론이다.

해직언론인도 5.18 보상대상 포함됐지만 기준 모호

광주시는 지난 3일부터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에 대한 접수를 받고 있다. 광주시가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 접수를 8년 만에 재개했으나, 구체적인 신청대상·보상 기준도 정하지 않은 채 ‘일단 접수해 보라’는 식으로 신청을 받고 있어 주먹구구식 행정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번 보상신청 접수는 지난해 12월27일 ‘5·18보상법’이 개정된 데 따라 이뤄진 것으로 그 대상이 5·18 관련 사망·행불자, 상이자, 질병·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수배·연행자 등 기존 대상자와 함께 5·18 관련 해직자, 학사 징계자, 성폭력 피해자가 새로 포함됐다.

광주시는 오는 12월31일까지 신청 접수를 받고, 그 이후 사실조사 및 5·18 관련 여부 심사 분과위원회, 장애등급 판정위원회 등 소위원회를 거친 뒤 5·18관련자 보상 심의위원회 심의·의결을 거쳐 보상금을 지급할 방침이다. 하지만 추가 신청 대상자인 해직자, 학사징계자,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 신청인 본인이 대상자에 해당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5·18 관련 해직자 중 해직언론인의 경우 직접 강제해직을 당한 언론인만 해당하는지, 1980년 7월 신군부의 정기간행물 폐간조치, 그해 11월 언론통폐합 등에 휘말린 피해자들도 포함되는지 등 기준이 관련법에 명시되지 않았다.

보상 지급액 기준도 아직 없다. 이 기준은 올해 말 행정안전부에서 지정할 예정이며, 광주시는 일단은 신청서를 기한까지 모은 뒤, 추후 마련되는 기준안에 따라 심사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광주시는 접수처를 찾은 신청인에게 어떤 피해 입증자료를 제출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안내하지 못하고 있다.

80년해언협 측 요구로 우편접수 포함시켜

시행령 발표 직후에는 접수방식을 광주시청을 방문해 현장 접수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어서 추가 신청 대상자만 해도 수천여명 수준으로 추정되는데다 전국 각지에 퍼져있는 상황으로 심각한 문제로 지적됐다. 이에 따라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측은 정부에 그 문제점과 함께 시정을 촉구해 우편접수가 가능토록 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광주항쟁 발생 이후 42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5·18 당시 계엄군에 발포 명령을 내린 자가 누구인지, 계엄군이 시민군을 향해 헬기 사격을 가했는지 등 이 아직 명쾌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이런 역사적 숙제를 해결하는 것과 동시에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광주항쟁 유공자들을 정당하게 예우해야 하는데 정부의 태도는 무성의, 무책임하기 그지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신청과 관련한 사전 홍보·안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신청 접수 사실을 모르는 피해자들이 많아 첫날부터 광주시청 민원실에서는 “혼란스럽다”는 불평이 터져 나왔다. 구체적인 신청 대상자 명단이나 보상 기준도 없고 어떤 입증자료를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80년 언론인 투쟁은 40여년간 역사왜곡, 정치공작 등의 폐해 속에 그 범위, 대상도 교통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인데 이번 기회를 통해 그것이 바로잡혀야 할 것이다.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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