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한 판 팔면 '한 판 값' 받는 장사… 신세계였죠"

[기자 그 후] (45) 임호림 육림델리카트슨 대표 (전 한겨레 디자인팀장)

아파트촌과 거리가 있는 서울 양천구 목동의 오래된 주택가에선 길을 잃기 쉽다. 가파른 언덕, 굽이굽이 골목길 탓에 다음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가보는 수밖에 없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길이 나타날 쯤, 3층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YOOKLIM DELICATESSEN’이라 적힌 1층 간판 아래 입구에서 임호림 육림델리카트슨 대표가 지난 23일 기자를 맞이한다. 한겨레에서 디자인팀장을 지냈고, 경력 대부분을 디자이너로 살아온 그는 지금 소시지, 햄, 베이컨 등을 직접 만들어 파는 ‘샤퀴테리(Charcuterie)’ 가게 사장이다. “작년 2~3월에 오픈 했으니 1년 조금 넘었네요. 어렸을 땐 ‘훌륭한 디자이너가 돼야지’ 생각했지 상상이나 했겠어요. 최근에 어떻게 살아왔나 돌아봤는데 거의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더라고요. 개연성도 없고 ‘참을성이 없는 인간이구나’ 싶었어요.”

한겨레에서 디자인팀장을 지낸 임호림 육림델리카트슨 대표가 지난 23일 서울 양천구 목동 자신의 가게 안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위에 살라미 소시지가 보인다.


1974년생 임 대표는 디자인을 업으로 여긴 청년이었다. 시각디자인 전공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 입사, 2001년 미국 유학을 갔다가 9·11테러로 유학자금 조달이 어려워져 돌아왔다. 2002년 돌아온 한국에서 디자인 외주작업을 하다 아는 선배 제안으로 시험을 치러 한겨레에 입사해 그래픽 기자로 2~3년을 일했다. 2004~2005년, 퇴사해 디자인 스튜디오를 열었지만 경영난을 겪었고 당시 주말섹션을 창간한 한겨레가 디자인팀장직을 제안해 2007년 재입사했다. 회사 운영 시 소송을 겪은 터 야간대학원을 다니며 저작권을 공부했고, 2010년 3월 로스쿨 진학을 위해 다시 퇴사했다.


“디자인 회사에선 마무리까지 몇 개월이 걸려 숨 막히는 게 있는데 신문은 하루 두세 시간 똥줄 타면 뒤돌아보지 않는 게 정말 좋았어요. 신문사에 인간적으로 재미난 사람이 많은데 초판 마감하고 한 모금, 나온 거 보고 함께 퇴근길 한잔하는 건 지금 제일 그리워요.”


그해 8월 시험 성적은 엉망이었고 아이가 생기며 재응시 대신 돈을 벌기로 했다. 마침 방콕에서 한인 소식지를 내는 회사가 아트디렉터 겸 편집장직을 좋은 조건으로 제안하며 1년을 태국에서 일했다. 2011년 귀국해 다시 디자인 사무실을 열었지만 사스, 메르스로 공공기관 홍보예산이 삭감되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어머니 소유 다가구 주택을 임차해 1층 사무실, 2층 공유숙박시설을 운영했지만 이후 집을 매매하게 되며 두 사업 모두 접는다. 이때 아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피자가게 양수’ 제안에 응하며 갑자기 요식업에 입문했다. 근처에 전문대학, 고척스카이돔이 있었던 가게는 “제법 잘 됐다.” 프랜차이즈의 한계를 절감하고, 건강이 안 좋아지기 전까지 약 3년간 여기 매달렸다.

서울 양천구 목동에 위치한 샤퀘테리 가게 '육림델리카트슨'.


피자가게를 접고도 요식업은 마음에 남았고 원래부터 새 음식과 요리에 관심 많던 그는 “내 장사를 해보자” 했다. “20년 일을 하루아침에 접고 상실감이 크지 않을까 했는데 2~3일 지나니까 열심히 피자를 만들고 있더라고요. 디자인을 하며 자존감이 무너졌는데, 피자 한 판을 팔면 한 판 값을 받는 먹는 장사는 정말 신세계였어요.” 태국 체류 때 먹어본 배 위에서 만드는 국수 ‘꾸어이띠우르아’를 아이템으로 정하고 유학을 추진했지만 코로나19가 터지며 엎어졌고, 맞벌이를 하는 아내 대신 가사노동을 전담하게 됐다. ‘샤퀴테리’ 가게를 차린 건 현재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다. 전세로 살던 아파트에서 나오게 되며 급하게 집을 구해야 했고 집 관련 지식이 있던 그는 동네 낡은 집을 사서 ‘대수선’하자고 제안했다.


6개월 공사 끝에 1층 ‘가게’, 2·3층 ‘집’ 구조의 건물이 들어선 게 현 자리다. ‘샤퀴테리’란 분야는 음식평론가, 기자, 요식업 종사자들에게 물어 “샤르모시기”란 답을 공통적으로 들으며 시장성과 장래성을 판단한 결과였다. 전문성이 필요한 만큼 한국바이에른식육학교, 훔메마이스터슐레 등 기관에서 교육도 받았다. “외할머니가 평안북도 의주 분인데 순대를 정말 잘 하셨어요. 학교 졸업 발표회 때 할머니 순대와 비슷하게 만들다 보니 선지랑 찹쌀이 들어가는 모르시아란 스페인 소시지가 되더라고요. 모르시아 델 ‘귀종’이라고 할머니 이름을 붙였는데 지금 가게 시그니처예요. 레드오션이 돼도 차별화로 생존하겠단 거고요.”

한겨레에서 디자인팀장을 지낸 임호림 육림델리카트슨 대표가 직접 만든 살라미.(임호림 대표 제공)

그렇게 소시지 5종과 레베케제, 살라미, 론지노, 메이플 베이건 등 햄, 드라이큐어링, 베어컨 제품을 혼자 만들어 판다. 월화수목엔 생산만 하고, 금토일엔 예약을 받아 오마카세 코스를 내놓는다. 판매는 온·오프라인을 함께 하는데 “매출은 아주 만족스럽진 않지만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다만 포장, 요리, 식당운영, 홈페이지까지 모두 혼자하다보니 몸이 축난다. 안정적인 사업을 위해 8월쯤 직원을 채용할 생각이다. B2B를 위한 해썹(HACCP) 인증도 급하다.


‘벽돌담’처럼 차곡차곡 쌓는 생이 있는 반면 어떤 순간 자기 앞에 놓인 돌멩이로 ‘돌담'을 쌓는 삶의 디자이너들도 있다. “불꽃처럼 부딪치고 포기하는 식으로 살았는데 호기심이 많은 걸 수도, 참을성이 없는 걸 수도 있거든요. 조직생활에서 분명 얻을 게 있기 때문에 버텨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나와서도 재미나게 살 수 있고요. 어릴 적 꿈의 크기가 쪼그라들면서 뭘할까 생각했는데, 제 새 꿈이 먹는 장사인 거 같아요. 5년 안에 방콕, 치앙마이, 푸켓에 하나씩 한국식 가공육 파는 가게를 여는 게 지금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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